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산중산담 2013. 4. 26. 22:48

익산 미륵산 둘레길을 3월 30일 토요일에 걷는다.

 

2013년 3월의 평일 기행을 3월 30일 토요일 하구 기행으로 연기하여 익산의 미륵산 둘레 길을 걷습니다. 백제의 네 번째 도읍지라는 이야기가 있는 왕궁탑 일대와 동고도리 석불입상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 그리고 동양 최대의 절터인 미륵사지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연동리 석불이 있는 곳입니다. 여산의 천주교 성지와 여산 관아터, 그리고 가람 이병기 생가가 미륵산 둘레 길에 있습니다. 또한 여산 송씨 제각, 문수사, 천일사, 등의 사찰도 그 인근에 있습니다.

 

마한의 왕궁 터라고도 하고 백제의 네 번째로 도읍지로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전해오는 왕궁평에 접어든다. 초여름부터 9월까지 이곳에는 석달 열흘 동안 화사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꽃 숲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꽃은 사라지고 까치밥으로 남겨진 못생긴 모과가 하나씩 매달려 있고 그 몇 개는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나는 떨어진 모과를 주워 향긋한 그 냄새를 맡으며 탑앞에 선다.

 

조선조 말에 간행된 「금마지」에 의하면 “왕궁평은 용화산에서 남으로 내려온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으며, 마한 때의 조궁 터라는 성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돌을 사용하지 않은 토성으로 그 곳 사람들이 밭을 갈다보면 기와 조각이 깔려 있고, 더러 굴뚝들이 나온다. 종종 옥패와 동전, 쇠못 등을 습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왕궁정은 군의 남쪽 5 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라고 한다.”고 하는 왕궁평에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왕궁리 오층석탑이 보물이었다가 뒤늦게야 국보(국보 289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탑이나 정림사지 석탑과 같이 백제탑이라는 설도 있고 탑신부의 돌 짜임의 기법과 3단으로 된 지붕돌 층급받침 때문에 통일신라 탑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제 양식을 계승하고 신라양식을 흡수하여 고려 초기에 건립된 탑이라는 설도 있다. 또 하나는 후백제의 창업주인 견훤과 관계가 있는데, “견훤의 도읍인 완산의 지세가 앉아 있는 개의 형상이므로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에 탑을 세워 누름으로서 견훤의 기세를 꺾어 고려 태조 왕건이 이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탑이 완성되던 날 완산의 하늘이 사흘 동안 어두웠다”라는 설은 「금마지」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진다. 왕건은 실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도선국사의 의견에 따라 비보사찰을 여러 곳에 세웠다.

 

왕궁에는 오층석탑만 남고

1965년 이 왕궁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 중 1층 지붕돌과 기단부에서 금으로 된 사리탑과 사리병 및 금으로 된 금강경 판이 나왔다. 국보 123호로 지정된 이 유물들은 현재 전주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또한 이 탑에는 또 하나의 분명치 않은 전설이 전해온다.“

 

“왕궁 탑을 지나 금마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들판 한가운데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석불이 마주보고 있다. 보물 46호로 지정된 동고도리 석불은 높이가 4․24m에 이르고 불상의 머리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는데, 동고도리라는 뜻은 금마가 예전에 도읍지였기 때문에 고도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고도리라고 부른다.

 

일설에 의하면 이 지역의 토호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웠을 것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금마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세웠다고도 한다. 이 두 개의 불상은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 자시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새벽닭이 울면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며, 석불 옆에 세워진 이 석불 중건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 서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虛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칠월칠석날의 견우직녀의 전설을 닮은 불상들을 뒤로 하고 금마 지나 미륵산 자락에 접어든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루는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 과 더불어 사자사獅子寺로 가고자 용화산 아래 밑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리자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여기다가 꼭 큰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동양최대의 절터 미륵사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과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신라 진평왕이 백 명의 장인匠人들을 보내 도와주었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는데 석탑石塔의 높이가 매우 높아 동방의 석5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5천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미륵사 인근 오금산(현재 익산 토성, 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와 미륵사 창건설화로 되어 있으며 또 다른 미륵사의 창건설화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세력의 중심이었던 이 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것이라고 한다. 무왕은 바로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어떻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를 받기도하지만 미륵사가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때 무장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전이 쓴 「와유록臥遊錄」에 의하면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100여 년 전에 부서 졌더라”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 정유재란 때에 불타버린 것과는 달리 다른 원인에 의해서 폐사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미륵사의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절터에는 논밭과 민가가 들어서 있었고 절의 석축들 대부분이 민가의 담장이나 주춧 둘로 사용되고 있었다. 발굴결과 일연스님이 기록한대로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서로 두 개의 탑이 있었고 각 탑의 북쪽으로 금당이 하나씩 있었으며 각기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이는 탑, 금당, 강당, 승방이 일직선상에 하나씩 배치되는 일반적인 백제계 탑과는 매우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정일의 <암자 가는 길>

 

백제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미륵산 둘레길을 하루 기행으로 걷고자 했던 분의 칙오 없으시기 바라며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