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산중산담 2013. 4. 26. 22:49

봄꽃을 보러 섬진강으로 가다.

 

봄이 오는데, 봄꽃이 피는데, 그 봄을 맞으러 가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섬진강으로 갑니다.

남원의 교룡산일대와 만복사지, 그리고 곡성군 고달면에서 압록에 이르는 구간을 걷고

매화꽃, 산수유 꽃등 봄꽃이 만발한 하동과 구례일대를 답사할 것입니다.

 

“앞서가던 최선생님이 “저기 아지랑이가 보이네요”하고 손짓해서 바라보는 박준열씨의 뒷모습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있다. 봄은 누가 뭐래도 봄인가 보다. 세상사 아무리 어지럽고 현란해도 그래서 사람들이 다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오는 봄을 누가 막으랴. 길옆의 웅덩이에는 개구리가 알을 낳았고 그 몸에는 노오란 양지꽃이 피었구나. 뒤돌아 오면 이른 봄 강은 저리도 푸르고 바람은 살며시 내 뺨을 간지럽히고 흐르는 강물에 시 한편이 살며시 내려앉는다.

 

강물에서

 

박재삼

무거운 짐을 부리듯

강물에 마음을 풀다.

오늘, 안타까이

바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아지랑이가 솟아

아뜩하여지는가

물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

꿈 같은 그 세월을

아른 아른 어찌 잊으랴,

 

하도한 햇살이 흘러

눈이 절로 감기는데......

그날을 돌아보는

마음은 너그럽다.

 

반짝이는 강물이사

주름살도 아닌 것은,

눈물이 아로새기는

내 눈부신 자욱이여!

 

곡성군에서 힘들여 조성한 이 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옛날 고향에서 흔히 보았던 듯 싶은 나무 정자다. 초가지붕을 이고 천장은 합판으로 만들었지만 바닥에 대나무를 깔아서 그런지 한결 자연스럽다. 조금 더 더워지면 이 간이 정자에 앉아 흐르는 섬진강 물을 바라다 보면 세상이 한결 넓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발길은 어느새 살골 나루터에 이른다. 조선조 초기 이곳에서 살을 막은 후 메기를 잡아 조정에 바쳤다는데 살은 사라지고 나루터에 배는 자갈 위에 올라앉아 있다.

고개가 가파른가 싶더니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이 고개가 뺑덕어미 고개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심청이의 고향이 이 곡성 어디쯤이라는 설이 있기 때문에 심술궂은 뺑덕어미를 이 고개에다 차용해 붙인 것이리라. 이 고개 마루에서 유재열 소장은 “신소장님 저 강물이 섬진강 재첩국 같은데요” 그래 그 말을 듣고 바라보니 흐르는 강물이 재첩국이다. 다슬기 국물처럼 푸르고 푸르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저 강물이 재첩국 같다고 할까. 좌측으로 나있는 길에는 만민교회 수양관이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만민교회가 저 만민교회일까? 대나무 정자에 잠시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가 다시 걷는다.

오곡면 송정리로 건너가는 두계나루터에는 한 척의 배가 매어있고 저만치 두가교가 보인다. 두계와 가정리를 합쳐서 두가리라고 이름 지은 두가리 가정마을에는 옛날 정자나무가 많았다는데 흔적이 없지만 한때 섬진강 물길 층에 가장 아름다운 두가교가 있다.

지금은 양옆을 가로막아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되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오고가던 다리였다. 이 다리가 세워진 것은 1979년 6월 29일 두가리에서 송정리로 건너가는 나룻배가 뒤집어지며 두가리 사람 3명과 이웃마을 사람 2명 외지사람 2명 등 일곱 명이 빠져죽는 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도지사는 그 소식을 듣고 이 다리를 급하게 세웠다.

그래서 두가리 사람들은 그때 이 다리를 만들어준 전남도지사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 돈 들여서 놓은 것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었는데도 고마워하는 그 마음을 뭐라고 할까?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현수교를 닮은 이 다리는 길이가 400m이고 강바닥에서 다리까지의 높이는 70m 다리 폭은 2.5m쯤 되는데 이 다리를 건너갈 때 혼자서도 굴러대면 다리가 흥청흥청하고 여럿이 서가면 출렁 출렁거리기 때문에 출렁다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심장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입구에서부터 겁을 내고 장난기 있는 사람은 더더욱 발을 동동 굴러서 사람들을 골려대기 일쑤이다. 5월의 어느 날 섬진강 푸른 물줄기를 바라보며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널라 치면 바로 아래 가정이 나루터 언덕에 철쭉꽃밭을 만날 것이다. 지리산 세석 평전이나 바래봉 철쭉만은 못하지만 화려하게 피어난 가정리 섬진강변의 철쭉꽃밭에서 한시절을 보낸다면 그 봄은 얼마나 따사롭게 아름다울 것인가. 그러나 그 많은 참게도 은어도 사라지고 구름다리 가든이라는 매운탕집만 남아있는 두가리에는 송정리로 건너가는 다리마저 시멘트로 만들어져 여울져 흐르고 있었다.

강 건너 송정리는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소정이 또는 송정리라고 부르고 길은 포장도로로 이어진다. 곡성군에서 자건거도로로 명명한 이 길에는 두 사람 한사람이 타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는 곳이 있어서 자전거의 행렬이 이따금씩 지나가고 대나무 숲은 강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린다.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어서 배장이 들이라 불리는 배장이에는 구례읍 논곡리로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지만 사라져 버리고 수해를 염려했을 때 콘크리트 건물임에도 2층만 제대로 만들고 1층은 뼈대만 앙상하다.

강물은 출렁이며 은빛으로 빛나고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강변 저쪽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고개를 넘어서자 저만치 압록이 보이고 155km 지점에 있는 압록 우연의 일치일까. 금강을 답사할 때도 그랬다. 2구간이 끝나는 영동군 심천면 날근이 마을 초강을 받아들이는 지점까지가 155km였었다. 섬진강이 보성강을 받아들이는 압록에 도착하는 155km지점에서 바람은 더욱 드세게 불어댔다. (...)

 

화개장터를 지나가다

여정은 드디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 접어든다.

“전라도와......”라고 조영남이가 노래 부르기 전부터 화개는 화개장터다. 소설 속에서 옛 시절의 화개 장터는 이러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이 만나던 화개장터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전라도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김동리 <역마(驛馬)>)

화개를 가장 화개답게 표현한 김동리의 역마가 아니라도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 옛날 화려했던 화개장터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다리 건너에 새로 만들어진 초가집도 아니고 콘크리트 집도 아닌 화개장터가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할 뿐이다.

월선네가 주막을 열었던 그곳은 어디쯤일까. 그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매천은 <오하기문>에서 화개동을 스쳐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은 어둠 때문에 추격하지 못하였으며, 날이 밝자 무리를 수습하여 부 안으로 들어와 민포를 모두 죽이겠다고 떠들면서 10여 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 안에다 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다. 화개동에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민포가 일어난 곳이라며 특별히 미워하여 연달아 5백여 채의 민가를 불태우고, 베틀과 물레, 나막신까지 약탈하여 바리바리 실어 나르느라 사오일 간 광양, 순천으로 통하는 길이 막힐 정도 였다. 민포 중에 앞뒤로 사로 잡혀 죽은 사람은 10여명 정도였다. 적은 계속해서 대엿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중에 흉포한 자들은 인배를 따라 진주로 갔다.”

불태워 버렸다는 오백여 채의 민가는 어느 곳에 있었을까. 옛 기억들을 회상할 길은 없고 푸른 대숲과 차나무와 푸른 섬진강물만 눈에 띄었다.“

신정일의 <섬진강을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