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산중산담 2013. 5. 1. 22:38

천삼백 리 한강 두번째를 걷는다. 낙천리에서 동강 가수리까지

-임계면 낙천리에서 동강 가수리 마을까지-

 

한강 천삼백 리 첫 번째 일정을 마치고 4월 넷째 주 두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조양강과 동강 구간을 걸어갈 이번 여정은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아우라지 뱃사공들의 아환이 서린 아우라지와 정선에 이르는 아름다운 길, 그리고 광하리에서 가수리에 이르는 동강길은 말 그대로

신선이 되어 걷는 듯한 느낌 속에서 걸을 수 있는 구간입니다. 특히 이번 행사는 두릎과 취나물등 지천에 피어난 봄나물로 전을 만들어 먹으며 걷는 행사와 함께 펼쳐질 것입니다.

 

“낙천교를 지나 이 고장 사람들이 자랑하는 미락숲에서 휴식을 취한다. 미락동은 원래 절터가 있었던 곳으로 미륵이 있었기 때문에 미륵동이라 불렀던 것이 바뀌어서 된 이름이다. 미락숲은 느티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인데 피서철이면 외지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이곳 미락숲 건너편에서 임계천이 골지천에 합류한다. 나는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제방으로 올라선다. 문득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잠시 옷이 무거워진다.(...)

 

소나무숲 우거진 산을 가로질러 내려가니 새로 만든 다리가 있고 그 다리에는 휴일이라 놀러온 사람들 몇 팀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서 사이다 한 잔씩을 얻어 마시고 나선 길은 이제 탄탄대로이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 구미정에 도착한다.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골지천가의 넓은 암석 위에 세워진 구미정은 규모는 열 평 정도로 조선 숙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던 이치가 기사사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 봉산리에 은거하면서 세웠다고 하는데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정자를 중심으로 주위의 경치가 아홉 가지 특색이 있다고 하여 구미정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항상 물고기가 많이 모인다고 하여 어량漁梁, 주위의 밭두렁이 그림보다 아름답다는 전주田疇, 주위에 있는 바위들이 섬과 같이 아름답다는 반서盤嶼, 주위 곳곳에 쌓아올린 돌층대의 아름다움인 층대層臺, 정자 한편에 위치한 연못이 바위가 뚫려 생긴 것이라 하여 붙여진 석지石池, 바위 하나의 넓이가 백 평 이상이 되고 평평하여 붙여진 평암平巖, 주위를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연못물같이 항상 잔잔하다는 징담澄潭, 주위의 기암절벽이 바위옷 이끼로 항상 푸르게 보인다는 취벽翠壁,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아름답다는 열수列峀가 그것이다. 또 이곳을 중심으로 18경을 얘기하기도 한다.(...)

 

개병교다리를 건너자 소나무 한 그루가 바람으로 뿌리가 뽑혀 넘어져 다른 나무에 열십十자로 접목되어 있는 것을 본다. 받아들인다는 것, 더불어 산다는 것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물막이 댐이 아래 부근에 있는지 물의 흐름이 보이지 않고 바람이 잔잔히 일어난다.

「고기 반 물 반인 우리 동네에 산불 없네, 반천 2리 주민일동」이라는 플래카드를 보며 반천리에 다 왔음을 안다. 반천대교 아래로 강은 다시 푸르게 흘러간다. 우우 휘몰아오는 바람소리는 강물에서부터 들려오는 것일까? 파랗고 빨간 '산불조심' 깃발이 무섭게 펄럭거리고 있는 마을길로 들어선다. 돌담이 아름답게 쌓여진 집, 뻥 뚫린 나무로 굴뚝을 만든 집, 나무구유가 찌그러진 함석지붕 밑에서 썩어가는 집…… 저 집에 사람이 살았던 시절은 어느 때쯤일까.

어천동마을을 지나며 강은 도장골로 휘어돌아간다. 느릅나무가든이라는 식당이 보이는데 이곳을 지나면 지도상으로 볼 때 쉴 데가 마땅치 않아 보였다. 우리들은 그 식당에 들어가 하룻밤 재워줄 것을 부탁했고 방안에 여장을 푼 것은 이른 여섯 시였다.

이곳 반천리의 노일 남쪽에는 산이 성처럼 높다고 하여 성북동이라는 마을이 있고, 어전 서쪽에는 서낭당 옆에서 달을 바라보면 다락 위에서 달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하여 월루라는 마을이 있다. 나는 이 집 주인어른이신 변상철(73세) 옹에게 이곳저곳 지명들을 물어본다. 도둑골이 어디쯤이냐고 묻자 월루마을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그가 도둑꼴인디 도둑놈들이 망을 보다가 사람이 오면 뛰쳐나와 도둑질을 했다는 큰바위가 있어요. 바위가 하도 커서 이 집만이나 하지."(...)

 

우리는 드디어 아우라지나루에 닿는다. 아우라지는 정선군 북면 여량리의 한강 상류에 있는 나루터로, 평창군 도암면의 황병산과 구절리에서 흘러내린 송천과 동쪽에서 흘러온 임계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이 아우라지의 뱃사공이 부르던 노래가 정선아리랑이었다.

정선아리랑, 즉 정선아라리가 처음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왕조 초기부터였다고 한다.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에 올랐던 선비들 중 7명(전오륜, 고천우, 김충한, 변귀수, 김한, 이수생, 신안)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깊은 산골인 개성의 두문동에 은신하다가 지금의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옮겨 살며 지난날 섬기던 임금을 사모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멀리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본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애달프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한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상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또다른,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란다.(...)

 

장열리 가평마을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철길과 42번 지방도로가 나란히 가는 길로, 한강 상류 길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아름다운 길일 것이다. 이곳 가평에서 장열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가평나루터였고 장열리에서 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꼬부랑 고개였다. 장열 본동 뒤쪽에 있는 바람부리마을은 바람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장열리 뒷산에 있는 얼음냉기라는 골짜기는 겨울에는 볼 수 없는 얼음이 여름철 삼복더위에 나타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밀양의 얼음골이나 전북 진안 성수의 풍혈냉천과 같은 역할을 했던 얼음냉기는 요즘에는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지 더 이상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않는다. 모양이 상투처럼 생겼다는 상투바위라고 이름이 붙은 상투바위는 어디쯤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안내원 없음」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건널목을 건너자 철다리가 나타난다. 길은 강을 따라 펼쳐져 있지만 돌아가야 하니, 철교를 건너기로 작정한다.

철교를 건너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의 과태료에 처한다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너간다. 1천만원짜리 대박(?)을 철로를 건너며 터뜨리고자 건너가는데 생각보다 철교가 멀기는 멀다. 촘촘히 연결된 침목을 건너서 바라본 강물은 짙푸르기 이를 데 없다. 여섯 명이 무사히 건넜으니 6천만원을 번 셈이 아닌가. 장열리에서 나진으로 건너던 나루터는 사라져 없고 철길 너머로 붉은 언덕이 푸르른 녹음 사이로 보인다. 긴 다리 장열대교를 지나 강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데 그 맛있는 매운탕, 얼큰하고 들큰한 매운탕에다 커피까지 마시고 기분 좋게 출발했는데 상정바위 아랫자락에서 그만 길이 없어지고 만다. 돌아갈 수도 없고 별 도리가 없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넌다"는 속담을 곱씹으며 물을 건너가기로 한다. 여울진 강을 건너기로 했는데 바위들에 부유물질이 끼어 왜 그리도 미끄러운지 카메라가 물에 잠길새라 한 발 한 발 뗄 적마다 바위를 헤치다 보니 발가락이 너무 아프다. 에라 모르겠다, 옷이고 신발이고 젖어도 괜찮다 마음먹고 건너도 물살은 왜 그리도 센지. 조심조심 걷지만 그래도 발이 아프다. 바라보면 강 건너는 아직도 멀다. 하여간 넘어지지만 말자.

깊은 강물의 돌을 손으로 들어내고 발로 휘저어가며 무사히 건너긴 건넜는데 웬걸 김형곤 씨와 손동명 씨는 칼날 같은 바위에 베어 피까지 나고 말이 아니다. 부상자가 속출했으니 고생도 고생이지만 오전에 벌어놓은 시간을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넣은 격이다. 그래도 다행히 누구도 넘어지지 않고 대장정을 마쳤다. 일 분이면 건널 거리를 십오 분의 사투 끝에 팬티까지 흠뻑 젖어 건너왔지만 물 마사지를 한 탓인지 다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렇다. 모든 행복이나 불행은 더불어 온다.(...)

 

강은 더없이 아름답고 조금 내려가자 인도 기행 전문인 혜초여행사가 운영하는 정선자연학교가 나타난다. 조금 쉬었다 가기 위해 나무 그늘 밑에 배낭을 내려놓는데 관리인인 듯싶은 사람이 다가온다. 어딘가 낯익다 싶어 자세히 보니 웬걸 부산 금정산을 출발 낙동정맥을 지나 진부령까지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했던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였다. 우리가 청학동과 섬진강 일대를 답사할 때 청학동의 찻집 '백두대간'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남난희 씨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김성규 씨는 남난희 누님이라고 반색을 한다.(...)

 

정선 읍내의 오일장에는 정선군 일대에서 채취된 산나물들이 다 쏟아져나온다. 참취, 곰취, 며느리취, 나물취, 참나물, 누롯대, 참두릅, 개두릅, 더덕, 고비, 도라지 등의 나물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선 여행의 별미인 콧등치기와 올챙이국수를 맛볼 수 있다. 콧등치기는 일종의 메밀국수다. 메밀을 반죽하여 국수를 만든 것인데 올챙이국수에 비해 끈기가 있고 단단하여 국숫발이 물에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육수에 된장을 살짝 풀고 깨소금 양념을 하여 먹는데 맛이 좋아 급히 빨아들이다 보면 국숫발이 살아 콧등을 친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올챙이국수는 찰옥수수를 갈아서 묽게 반죽을 하여 나무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밭아낸 것이다. 찰기가 적어서 국숫발이 부슬부슬 끊어지는데, 갖은 양념을 하여 묵처럼 말아서 숟갈로 떠먹는다. 하지만 옛 시절 정선의 명물이었던 꿩꼬치산적 같은 음식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강물 속에 발을 담가서 그런지 발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여울져 흐르는 강물 위로 광하교가 걸쳐 있고 그 위에 내방산은 푸르름으로 솟아 있다. 광하교를 지나는데 「세월댐 수몰민 생존권 투쟁」이라고 씌어진 흰 페인트 글씨가 보이고 그 아래 간이포장마차에는 「조양강 래프팅」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생존권 투쟁이 벌어지는데 또 한쪽에서는 래프팅 때문에 동강 자체가 훼손되고 있으니. 「국민의 강 동강을 보존합시다」라는 안내판을 보며 여기서부터가 동강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선아리랑을 연구하는 진용선 씨는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아우라지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말을 썼고, 표기도 지금의 동녘 동東이 아니라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고 말한다. 영월읍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강, 서쪽은 서강이라고 쓴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였다는 것이다. 이곳 동강에는 열두 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여울과 소, 절벽, 섶다리, 마을 풍경들이 그것들로서 1경-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 2경-운치리의 수동(정선군 신동읍) 섭다리, 3경-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백운산(고성리~운치리, 해발 882.5m)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바새마을 앞 뼝대, 7경-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어라연(거운리), 12경-된꼬까리와 만지(거운리) 등이다. (...)

 

귤암리에서 가수리까지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고 공사장을 지나자 모평마을이다. 광석나루 위쪽 조양강 물 가운데에 섬처럼 솟아 있는 바위가 섬바우이고 저 안쪽에 있는 망하마을은 광하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지만 물이 귀한 곳이다. 근처에 큰 강을 두고서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는 망하마을에서 평창군 미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비행기재이다. 원래 이름은 아전치였는데 이 고개가 하도 높아서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하여 비행기재라고 붙인 것이다.

그 고개 너머 평창을 두고 정귀진鄭龜晉은 "우연히 흐르는 물을 따라 근원의 막다른 곳까지 와서, 공연히 복숭아꽃 비단 물결 겹치는 것을 볼 뿐, 동학洞壑 속의 신선의 집은 어디에 있는고, 흰구름이 일만 그루의 소나무를 깊이 잠겄네" 하였고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중원中原의 서기書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옛 고을 용납할 만하고,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의 높이로구나" 하였다.

모평리를 지나 귤암리에 도착한다. 귤천과 의암의 이름을 따서 귤암이라 이름 지은 귤암마을의 옛이름은 산내울이었다. 강 건너로는 산의 모양이 나발처럼 생겼다는 나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뚝우뚝 솟은 산세가 저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을 지닌 듯싶지만 침묵한 그 산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