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삼백 리 한강 세 번 째를 걷는다.- 동강 가수리에서 어라연까지-
한강 천삼백 리 두 번째 일정을 마치고 5월 넷째 주 세 번째 여정에 오릅니다. 남한강 물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동강의 절경 중에서도 절경 구간을 걸어갈 이번 여정은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구간입니다. 산과 산 사이를 유장하게 흐르는 동강의 비경을 걷다가 보면 저절로 신선이 되를 느낄 수 있는 구간입니다.
:여정은 정선을 벗어나 신동읍에 접어들고 모퉁이를 돌아가자 독대로 두 사람이 고기를 잡고 있다. "고기가 많이 잡혀요?"라고 내가 소리치자 "별로 안 잡혀요"라면서 고기를 건져내고 있다. 김성규 씨는 허리가 구부정해진 채 절뚝이며 지팡이를 짚고 간다. 그래 얼마나 허리가 아프고 물집 잡힌 다리가 아플까. 나는 먹음직스럽게 피어 있는 두릅 몇 송이를 따서 발이 아파 절룩거리며 뒤따라오는 김형곤 씨에게 건넨다. 천삼백 리 한강을 따라 걷는 종주 길에 후송차는커녕 호송차도 없이 가고 있는 이 안쓰런 나그네들이여. 아무래도 오늘밤 잠자리에선 신음소리가 요란할 듯싶다.
일천 산에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고
이색은 그의 시에서 정선을 "일천 산엔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고 하였고 곽충룡은 "일백 번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멀리 바다로 향하고 천 층으로 층계진 절벽은 하늘에 의지해 가로질렀네"라고 하였다.
그토록 궁벽진 산골이라 이 지역에서는 ‘앞산과 뒷산에 빨래 줄을 맨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강은 좋은 이웃이다.“ 라는 조지 허버트의 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지역이 강원도의 영월 평창 정선 지역일 것이다.
강 건너 하매마을의 나루터에는 신동읍 운치리로 건너오는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 큰물이 지거나 장마 때에는 고립된 채 살아야 할 하매마을까지 다행히 정선읍에서 버스가 들어온단다. 이렇듯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오지라서 고려 때의 한철충은 그의 시에서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라고 하였고 정추는 "하늘 모양은 작기가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르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요 근래에도 이 지역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장을 두고 "하늘이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거나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랫줄을 맬 수 있는 곳" 또는 "닭이 울면 그 소리가 온 고을을 메울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다. 또한 안축은 그의 시에서 "산마을에 돼지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쪄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 없다"하였다.
번평마을에 와서야 처음으로 가게를 만나지만 그나마 문은 열쇠로 굳게 잠겨 있다. (...)
그 멀고 먼 고갯길을 넘어서자 마을이 나타나고 밭을 매는 아주머니에게 마을 이름을 물어보고서야 이 마을이 소사임을 안다. 우리가 지나온 것으로 착각했던 소사마을인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연포로 건너가는 소사나루가 있는데 다행히 찻길이 나 있다. 강가에는 두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문득 바람이 분다. 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강변에 누워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을 바라다본다. 뒤따라온 김성규 씨는 배낭을 내려놓으며 '아이고고고'를 연발하고 진재언 씨와 김형곤 씨는 상이군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다리가 아픈 표정이 역력하다.
연포마을 앞 동강에는 세 개의 뼝대(뼝창이라고도 불리는데 깎아지른듯한 선돌을 일컫는다)가 연달아 서 있는데 흡사 작은 마이산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곳 연포에는 열 집 정도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이해동(44세) 씨 한 집만 살고 있다. 푸른 나무숲 사이로 작은 동굴이 보이고 운동장과 교실 세 개가 있는 연포초등학교가 있다. 69년 마을사람들이 손수 지었다는 연포초등학교는 99년에 폐교가 되었다. 학교를 마을에서 공동관리하고자 했지만 일 년 임대료 3백만원을 낼 수가 없어 타지역 사람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한국동굴탐험학교」라고 씌어진 간판이 있지만 개점휴업 상태인 듯 사람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가정까지 5km, 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하룻밤을 신세져야 할 민박집은 있을까? (...)
우리가 걸어가는 산은 참으로 깊고 깊다. 이렇게 깊은 산골이라서 성현은 그의 시에서 "피곤한 말이 실 같은 가는 길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 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 년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천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동산의 달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떼돈을 벌었던 떼꾼들은 사라지고
아랫길로 갈까 윗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윗길로 오르자 집 한 채가 나타나고 먼저 갔던 김현준 씨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휴! 오늘 잠잘 곳은 저 집인가. 놉(인부)을 얻어서 고추를 심었다는 거북이마을 정광섭 씨 댁에는 몇 사람이 앉아 김치전에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6반 연포. 동강댐 수몰지역이라서 집의 개보수는 물론 무엇 하나 고치지 못했다는 정광섭 씨의 집은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외양간에선 두 마리의 소가 정답게 여물을 먹고 있고 전기가 들어온 지도 불과 3년이라고 한다. 정광섭 씨 집의 부엌은 지금도 장작불을 때고 있었다.
느닷없는 손님들이 닥치자 영월 읍내에 살고 있다는 큰딸이 돌을 갓 지난 애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방을 치우고, 소죽을 끓이는 큰 솥에다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장작불을 때기 시작한다. 저녁밥은 금세 나왔다. 취나물에다 여러 가지 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 그중에서도 일품이 민물고기조림이었다. 쫀득쫀득하면서 감칠맛 나는 조림맛의 비결은 불에 약간 구운 뒤 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뗏사공들 돈벌이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떼돈을 번다는 말이 생겼다는데 정말로 떼돈을 벌었느냐고 묻자 "그렇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었다고 해요. 열여덟, 열아홉에 뗏목을 탔는데 떼 타가지고 돈 벌어서 술값으로 다 나가고 순전히 재미로 했지요. 갔다와서 또 나무를 모아가지고 또 내려가고 그랬지요. 떼돈이라는 것이 뗏목(뗏목은 떼群와 목木이 합쳐진 말이다) 띄워서 번 돈이지, 떼돈이 정말로 왕창 버는 돈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아우라지에서 여그까장 육십 리쯤 되는디 물 좋을 적에는 한나절이면 오지요. 그런디 황새여울이나 된꼬까리여울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거그 가면 굵은 바위들이 많이 있는디 바위마다 이름들이 있어요. 관일이가 뗏목을 끌고 가다 부딪쳐서 죽은 관일이바우, 승문이가 부딪쳐 죽은 승문이바우 등 많이도 있어요. 두태바우여울을 지나면 된꼬까리여울이 있는디 저그서부터 영월까지는 여울이 없으니까 술집들이 잘 되었지요. 그래서 '황새여울 된꼬까리여울 떼를 지어놓고 만지에 전산옥이야 술판 차려놓아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고 노래를 불렀지요."(...)
백룡동굴은 강 건너에
굽이굽이 일곱 고개가 붙어 있다는 칠족령(좌족령)을 넘어 돌아갈 수도 없고 강을 건너기로 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저편으로 우리를 강 건네주고 그 강기슭을 따라 걸은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절매마을에 도착하자 더욱 난감하다. 옛날에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매라고 이름 지은 이 마을에는 두 집이 살고 있는데 다 비어 있고 문에는 자물쇠만 채워져 있다. 배라도 있을까 두리번거려도 저 건너 문희마을의 나루터에만 나룻배가 매어 있으니 어떻게 한다. 011, 018, 017, 016 모두가 먹통이니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우리들은 난감해진다.
결국 김형곤 씨가 옷을 벗고 팬티 바람으로 헤엄을 쳐서 건너 배를 몰고 오겠다고 건너갔지만 배는 굵은 와이어로 매어져 있고 자물쇠까지 채워놓았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시 김현준 기자가 헤엄을 쳐서 건너가도 소용이 없다. 외딴섬 절해고도에 갇힌 채 우리들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강 건너 백룡동굴이 있다는 푸르른 절벽을 바라보며 수영도 못 배운 내가 한심하기만 하다.
김현준 기자가 웃통을 벗어제친 채 문희마을(문희마을의 옛이름은 뇌른마을인데 산 아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로 가서 마을주민 이학균 씨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망치로 그 와이어를 끊어서 무당소라고 이름 지은 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두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
강가의 뽕나무엔 오디가 주렁주렁
사람 소리에 놀란 물새들이 강가에서 날아오르고 그 날아오르는 날개깃 사이로 새카만 오디가 다닥다닥 열려 있는 뽕나무가 보인다. 작지만 달디 단 오디 앞에서 우리들은 떠날 줄을 모른다. 가긴 가야 하는데 입술도 손도 새카맣다. 길가에 피어난 것이 어디 오디뿐인가. 새푸른 새 머루가 주렁주렁 열려 있고 피어난 나리꽃 옆에 빨간 산딸기가 소담하게 익어 있다. 유년의 내 고향집에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먼저 열리고 제일 맛이 좋았던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가 있었다. 나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그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먹곤 했었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눈독을 들인다더니 오디, 딸기에 눈 멀다 보니 한참을 늦었다. 어라연에 도착하자 줄 배로 사람을 건네주는 나룻배 한 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녘이라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하긴 백 년도 못 사는 사람들이 천 년의 걱정을 하고 살지 않는다던가. 영월읍 거운리 길운마을 안용남(58) 아주머니는 물이 없어서 줄로만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노 젖는 솜씨가 수준급이다.
동강의 절경 중 제1경으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어라연은 상선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물길이 갈라져 흐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어라연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다.
어라연은 영월군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이곳에서 변을 당하곤 했다. 하루는 그 뱀이 물가의 돌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다.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니 나라에서 권극하라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권극하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 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후로는 이곳에 뱀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처럼 이곳 어라연 부근에는 뱀들이 많다고 한다. 만지나루 뒷산에 오르다 보면 지금도 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상선암, 하선암, 중선암이라는 세 개의 바위와 흐르는 동강 물줄기가 빚어낸 이 어라연의 이름에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 그 첫 번째이고, 물 반 고기 반일 정도로 물고기가 많아서 어라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이고, 상선암에 나 있는 하얀 이끼가 물에 차면 마치 고기떼가 비늘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세 번째이다.
그러저러한 사연들 속에 전해오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니 삼촌이었던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비운의 임금 단종에 얽힌 이야기이다. 세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혼백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에 어라연으로 오게 되었다. 단종의 혼백이 갈 곳을 잃어 멍한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물고기들이 모두 머리를 들고 단종의 혼백에게 눈물로써 이제 그만 제 갈 길로 가시라고 간청을 하였다. 그 정성을 받아들인 단종은 그 길로 태백산으로 들어갔고 그 후 단오 때만 되면 아무리 날이 맑다가도 큰비가 내려 어라연 일대를 구슬프게 적신다고 한다.
이번 여정은 인원을 선착순 90여명으로 하고, 배를 타는 관계로 3천원을 더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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