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꽃피는 봄날에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4. 4. 17. 00:08

꽃피는 봄날에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을 걷는다.

 

이른 봄꽃이 피는 삼월의 중순, 지리산 자락의 섬진강을 갑니다. 봄꽃이 아름다운 이곳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에는 아픈 역사들이 남아 지나는 길손들에게 바람으로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과 아름다워서 슬픈 지리산과 섬진강의 봄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에 참여를 바랍니다.

 

“남원 거쳐 곡성, 구례, 하동에 이르는 길은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이고, 섬진강을 따라 가는 길은 지리산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에게 지리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지리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음의 발길을 지리산으로 향하게 하는가. 전설 속에 지리산은 반역의 산(反逆山), 불복의 산(不服山)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할 때 이 나라 명산에 기도를 올려 창업의 뜻을 물었다. 그때 지리산만 반기를 들고 태조의 뜻에 따르지 않아서 반역의 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만 가면 살 수 있다고 믿고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천년을 두고 들어갔던 곳이 지리산이다. 답이 없는 생각을 안고 지리산으로 섬진강으로 떠났다. 그 길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김개남, 김인배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농민군의 못 다 부른 노래가 떠돌고 있다. 김지하가 절창 「빈산」에서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이라고 노래했던 지리산 자락 아래 섬진강이 흐른다.

섬진강을 따라가는 곡성에서 구례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운치 있고 수려한지 가본 사람은 안다. 승용차나 버스로 가는 것보다 전주나 남원에서 아침 일찍 완행열차를 타면 여행하는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곡성 압록역에 내려서 강변을 따라 걸어가면 강물 위를 부는 시원한 바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밤재터널을 지나 산동으로 가는 길도 남다른 맛이 있다. 만복대, 고리봉, 노고단, 간미봉, 원사봉, 지리산의 연봉들이 물 흐르듯 흘러내린 곳에 펼쳐진 너른 들녘을 바라보며 가는 길도 남다른 기쁨이 있다.

산동에 접어들면서부터 구례만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밭 가장자리와 담벼락에 노란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었다. 산동에서 구례, 광의에서 천은사로 가는 길, 하동으로 가는 길마다 핀 산수유. 구례의 봄은 산수유 환한 꽃이 데려오는 것만 같다. 산수유뿐 아니라 목련이며 매화며 복숭아꽃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 온통 꽃 천지였다.

산동에서 구례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좌회전하여 광의면소재지에 차를 세웠다. 가게에 들어가 매천 선생이 계시던 월곡마을이 어디쯤인지 물었다. 천은사 가는 길로 가다가 아래쪽으로 꺾어지라고 가르쳐준다. 월곡마을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넘었다. 봄은 이곳에도 당도해 집안 가득 꽃이 피어 있었다.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한말의 이름난 시인이었고 절개 높은 선비였던 매천 황현이 살던 곳이다.

“유림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꽃나무 그늘 아래서 매천의 증손자 황의강 씨가 혼자 장작을 패고 있었다. 장작을 패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무의 어느 결에 도끼날을 정확하게 내리꽂아야 쩍 하는 소리가 나면서 순결한 속살을 드러내고 갈라지는가를. 그때의 그 시원함을. 나는 매천사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이곳에서 매천은 동학농민혁명을 처음에서 끝까지 자세하게 기록한 「오하기문」을 남겼다.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아! 화변이 온다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운수가 있고, 일이 막히거나 태평스러운 것도 때로는 서로 뒤바뀐다. 이것은 비록 시운(時運)이나 기화(氣化)가 한결같이 정해져 있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지만, 사람들 일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 것이니, 대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형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요,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천은 1855년 12월 11일, 전라남도 광양면 봉장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신라 때 시중벼슬을 지냈던 원이었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장수사람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황진도 그의 선대 조상이다. 몰락한 시골선비 황시묵과 풍천 노씨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총명이 뛰어나 보는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7살에 입학하여 시를 읽기 시작하였고, 11살에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한시를 지었다.(...)

 

“화엄사 가는 길로 접어들어 화엄사는 가지 않고 하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어린 벚나무가 벚꽃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하동에서 화개에 이르는 길은 벚꽃 잔치가 흐드러졌으리라. 모퉁이를 돌면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다. 풍수지리상으로 이 마을은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이라고 한다. 남한의 3대 길지 중 하나다. 집을 지으면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 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이곳에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사람 유이주가 운조루라는 아흔아홉 칸짜리 집을 지었다. 그 뒤를 따라 몇 십 명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짓기 시작해 해방 무렵에는 300여 채가 들어섰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중요민족자료 8호로 지정된, 1400평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뿐이다. 아랫마을에 금가락지 모양으로 높은 담과 대숲에 둘러싸인 기와집 한 채가 남아 있다.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지준이 ‘이 꽃이 떨어지게 되면 모든 사람이 애석하게 되니 이 땅은 모든 사람에게 애석함을 주는 인물을 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집에도 아픈 역사가 있었다. 지금 운조루를 지키는 사람이 시인 이시영의 누님의 아들인데 그의 큰아버지였던 유종택씨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일본유학을 마친 인텔리였다. 그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토지면을 벗어나니 다시 섬진강이다. (...)

길은 강변을 따라가고 강은 바다로 향해 흘러간다. 어느새 피아골 입구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가장 붉게 타오르는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이 있고 그 길목에 연곡사가 있다. 토지에서 서희의 할머니 윤씨부인은 연곡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동학접주 김개주를 만난다. 윤씨부인은 아이를 배고 구천(김환)이를 낳게 된다. 구천이는 김개주의 형, 우관스님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평사리에서 형수인 최치수의 아내와 지리산으로 숨어들고 만다. 화개장터로 유명한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이 피아골과 지척이다.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 화개를 가장 화개답게 표현한 장터 풍경이 나온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가끔 전라도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터였다. 지금은 옛날 화려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현대식 상가로 정비되었다. 월선네가 주막을 열어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갔나. 매천은 「오하기문」에서 화개동을 지나간 농민군의 행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적은 날이 밝자 무리를 수습하여 부 안으로 들어와 민포를 모두 죽이겠다고 떠들면서 10여 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 안에다 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다. 화개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민포가 일어난 곳이라며 특별히 미워하여 오백여 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베틀과 물레, 나막신까지 약탈해 바리바리 실어 나르느라 광양·순천으로 가는 길이 며칠 동안 막힐 정도였다. 민포 중에 앞뒤로 사로잡혀 죽은 사람은 십여 명 정도였다. 적은 대엿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중 흉포한 자들은 인배를 따라 진주로 갔다(...).

 

한국문학사에 가장 방대한 소설 「토지」의 주무대 평사리의 행정구역명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조선조 말에서 해방공간에 이르는 세월 속에 최참판댁의 4대에 걸친 가족사 이야기다. 평사리에서 북간도, 진주, 서울 등을 오가며 펼쳐지는 「토지」는 동학, 무속, 유가와 기독교적 윤리관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20여 년 만에 완결된 「토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인사도 하기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래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이때부터 타작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들뜨기 시작하고 남정네 노인들보다 아낙들의 채비는 아무래도 더디어 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식구들 시중에 음식 간수를 끝내어도 제 자신의 치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후우이이- 요놈의 새떼들아!」(...)

 

악양을 벗어나자 배꽃이 눈부시다. 하동여고에 근무하고 있는 류재훈 선생이 하동 자랑에서 빼놓지 않고 자랑하는 재첩국을 식당마다 메뉴로 내세우고 있다. 술 마신 뒤에 한 그릇 마시면 속이 확 풀린다고 한다. 제철을 만났는지 섬진강에서 재첩 잡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것만 봐도 하동이 멀지 않다.

갑오년 당시 경상도 하동과 광양 지방의 큰 전투는 금오산과 광양의 섬거역 그리고 고성산전투를 들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면 죽은 혼령들이 고시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성산을 고시랑산이라고 불렀을까. 「오하기문」은 영호대접주 김인배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9월 초하루. 금구(金溝)의 적 김인배가 광양·순천지방의 적과 합세하여 하동을 함락하였다. 이 무렵 하동지방의 적 가운데 광양에 숨어 있던 자들은 처지가 궁핍하여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매우 분하고 원통해하며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마침내 인배를 끌어들이고 여러 포들에게 8월 그믐 무렵 하동에 모이라고 하였다.

부사 이채연은 적에게 원한을 샀으므로 겁이나 대구로 도망쳤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주부(主簿) 벼슬을 지냈던 김진옥을 민포대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통영에 급히 사람을 보내어 대완포 12좌를 얻어와 강변에 매설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인배는 순천역 유하덕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강가에 진을 쳤다. 적들은 하동의 방비가 엄중한 것을 보고 겁이 나서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인배는 부적 한 장을 그려 수탉의 가슴에 붙여 백 보 앞에다 놓고 자신의 심복포졸에게 총을 쏘도록 하였다.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닭은 반드시 총알을 맞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접장들께서는 저의 부적을 믿으십시오” 라고 하면서 연달아 세 번 총을 쏘았는데, 하나도 맞지 않았다. 적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부적의 효험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부적을 옷에다 붙이고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넜다.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섬진강의 얕은 여울 중 물살이 세찬 곳을 건너 부(附) 북쪽에 진을 쳤고, 또 한 갈래는 망덕 나루터에서부터 배다리는 이어놓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부 남쪽에 진을 쳤다. 하동부는 원래 성곽이 없이 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을 향하여 있는 지형을 지리적 이점으로 삼았는데, 지방병력과 민포들은 부 뒤쪽 안봉(鞍峯)에 진을 치고 있었다. 또 대완포를 발사할 때 점화방법을 정확히 몰라 발사가 지체되었고, 포탄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적은 재빨리 엎드려 피해버렸으므로 관군은 겁을 먹었다. 2일 초저녁, 어둠이 내리자 적은 함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맨몸에다 부적을 붙이고 육박해 올라왔다.

 

김인배는 전라도 금구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스물넷에 영남과 호남을 모두 관할하는 영호대접주가 되어 동학농민군 10대 접주의 한 사람으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진주성을 점령했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10월 22일 밤 8만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섬진강을 건너갔다.

그는 다시 엿새 뒤 좌수영을 공격했고, 몇 번에 걸친 좌수영 공격에 실패한 뒤 물러서고 말았다. 김인배는 붙잡혀 광양객사에서 효수되었다. 언제 죽었는지 제삿날을 몰라서 후손들은 쌀가루에 새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난 날 12월 9일을 기일로 정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여정은 이제 섬진강 5백리길 끄트머리에 서 있다. 하동에서 광양으로 건너가는 다리에 서서, 섬진강과 하동 송림을 바라본다.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저 소나무 우거진 송림에 모여 앉아 군사동맹을 맺었다. 백사청송의 고장이라는 이름은 섬진강변의 모래와 송림에서 비롯되었다. 광양 섬진강 강물에 빠져 죽은 농민군이 3~4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지리산으로 백운산으로 숨어 들어가 화전민도 되고 의병도 되었다.신정일의 우리 땅 걷기

<갑오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