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두 번 째 -함평 지나 영광 법성포로 가는 길-

산중산담 2014. 4. 17. 00:33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두 번 째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두 번 째

-함평 지나 영광 법성포로 가는 길-

 

2014년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의 테마 도보답사 <서해안 기행>이 삼월 마지막 주에 두 번째로 실시됩니다.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에서 시작하여 영광군 염산면에 이르고 배바위 해수욕장을 지나 원불교 성지인 영산 성지가 있는 백수읍을 거쳐 법성포에 이르는 길이 다음 달에 걸어갈 길입니다.

백수 해안도로에서 멀리 보이는 중국의 산동반도를 바라보며 걸어갈 이번 기행은 봄의 초입에 봄을 맞으며 걷는 아름다운 걷기가 될 것입니다.

 

법성포항에 있는 영광굴비

갈재의 서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 영광․함평․무안이고 남쪽이 장성군과 나주시인데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에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는 옛 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릅답고, 민가[閭閻]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나라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李資謙)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拓俊京)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겸은 칠산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잡혔던 영광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

전4-6법성포

법성포는 조선시대 영산포와 더불어 호남지방의 세곡을 갈무리했던 조창(漕倉)의 기능을 맡았었다. 그 무렵 조창의 중심 역할을 했던 나주와 영산포가 뱃길이 멀고 험하여 배가 자주 뒤집히자 중종 7년에 영산포 조창을 없애고 법성포로 옮겼다. 그때부터 법성포에는 광주, 옥과, 동복, 남평, 창평, 곡성, 화순, 순창, 담양, 정읍, 을 비롯한 ,전라도 일대 12개 고을의 토지세인 전세(田稅)가 들어왔다. 동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15채가 들어섰고, 배가 20채에서 50채까지, 전선이 22채, 수군이 1700여 명이 머물렀다.

이처럼 법성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라도 제일의 포구였다. 고깃배 선단이 포구에 들어오면 법성포 외양에 있던 목넹기에 파시(波市)가 섰다. 충청도 전라도 일대의 어물상들이 떼 지어 물려와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을 세곡을 받을 때는 큰 도회지를 연상케 했던 법성포는 이젠 옛날만 회상할 뿐이고, 화려했던 법성포는 옛 이야기 속의 한토막이 되었다.

 

도온 시일러 가세에에

돈 실러으어 가으세에에

여영광에 버법성포에라 돈 시일러 가.

 

온 나라에 이름이 나도록 떼를 지어 몰려들었던 굴비가 수심이 얕아진 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나타나고, 다른 운송수단의 발달로 포구의 기능은 쇠퇴하고 말았다. 파시 때마다 흥청거리던 법성포의 영광은 언제 다시 올 것인지 기약이 없다. 홍농면에 자리한 원자력 발전소의 그늘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법성포에는 어느 바다에서 잡혔는지도 모르는 굴비들이 걸려있다. ‘영광굴비’ 또는 ‘이자겸李資謙굴비’라고 쓰인 간판들을 바라보면 이곳이 바로 굴비의 고장인 영광이라는 걸 안다.

이곳에서 나는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인종 때 인종의 외조부이면서 장인이었던 이자겸 때문이다. 사위를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했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다가 부하인 척준경이 배반하여 이곳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는 이 맛이 빼어나게 좋은 ‘영광 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으로 진상하였다. 석어라는 이름은 조기를 소금에다 절여서 토굴에다 한 마리씩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하룻밤을 지낸 뒤에 꺼내어 말렸기 때문이었고 굴비라는 이름은 비겁하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라 안에서 영광굴비를 최고로 치는 것은 이곳의 조기가 통통히 알을 밴 오사리 때에 잡아서 말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다른 지방에서 조기를 말리는 것과 다르게 ‘섭 간장’ 방법으로 굴비를 만드는 때문이다. (...)

 

방장산 자락에 있는 고창의 옛 이름은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었다. 신라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고창군은 1914년에 무장현과 흥덕현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에 “고창은 본래 시내와 산의 좋은 경치가 있다고 일컬어 왔으며, 토지 또한 기름지고 넓어서 오곡이 잘 된다”고 써 있는데, 고창군에는 방장산․문수산․태청산․소요산․선운산 등이 펼쳐져 있고, 문수산에서부터 발원한 인천강과 주진강이 흐르고 있다.

 

선운산이 있는 고장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반등산은 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신라 말기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웅거하여 양가의 자녀가 많이 잡혀갔다. 그 가운데 장일현에서 잡혀온 아낙이 있었는데, 노래를 지어 그 지아비가 곧 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하였다. 곡명을 ‘방등산가’라고 일컫는데, 방등이라는 말이 바뀌어 반등이 되었다”라고 씌어 있는데, <방등산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고창에는 소리꾼이 많다. 진채선 신재효, 김소희 등이 그들이고 그래서 “고창 사는 사람치고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장단 못 맞추는 사람 없다.”는 속담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李書九)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호남가>에 “고창성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바라보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고창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모양성(牟陽城)이라고 부른다. 해미읍성․낙안읍성과 더불어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모양성은 단종 1년(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에 이항(李杭)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에 걸쳐 쌓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벽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계유년에 쌓았다는 글자가 남아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내에 세 개의 연못과 세 개의 하천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성종 17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고창성은 여자들의 성벽밟기로 유명한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게 되며 세 바퀴 돌면 저승길을 환히 보며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삼월이 가장 효험이 좋고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등에 성벽 밟기를 하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가을에 열리는 고창 모양성 축제 때에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떨어지면 큰 불상사가 날 수도 있다. 실제로 오래 전에 ?산골소녀 옥진이?라는 시집을 펴냈던 김옥진씨는 고창여고 재학 중 성벽밟기를 하다 떨어져 반신불수가 되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모양성에는 여름햇살만 남아

모양성 바로 입구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다. 그 집이 판소리 여섯 마당 중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의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의 집이다. <동리가>에서 “시내 위에 정자 짓고 정자 곁에 포도 시렁 포도 곁에 연못이라 ···” 했던 것처럼 그는 본래 광대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니었고 재산이 넉넉한 양반이었는데, 풍류를 즐기는 성품을 타고 나서 판소리와 함께 민속음악들은 연구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친 것이다.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김세종(金世宗)․정춘풍(鄭春風)․진채선(陳彩仙)․허금(許錦)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신재효와 진채선 사이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한토막 전해진다.

고종 4년에 경복궁이 세워지자 경회루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진채선이 <

방아타령>을 불러 이름을 날리게 되자 대원군은 진채선을 포함한 기생 두 명을 운현궁으로 데려가 ‘대령 기생’으로 묵어두었다. 갔다가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돌아오지 않자 외로움을 느낀 신재효는 그 외로움을 <도리화가(桃李花歌)>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는 쉰아홉,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1876년에는 흉년이 들어 사람들을 도와준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기도 하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뿐만이 아니라 <도리화가> <광대가> <오십가> <어부사> <방아타령> <괘씸한 양국놈가> 같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분명하고 완벽한 사설을 정리한 한국의 셰익스피어라는 칭송과 함께, 그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이 지나치게 한문투로 만들어져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판소리의 맛을 크게 줄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한편 고창읍 중림리와 도산리, 아산면 상갑리 일대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군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에 가장 남쪽에 있는 도산리 고인돌은 민가 몸채 뒤에 홀로 서 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장독대 한 켠에 또 다른 장식물처럼 서 있었는데, 장독대는 사라지고 잔디가 깔려서 왠지 모를 어색한 풍경으로 변해 버렸으니 쓸쓸함을 금할 수 없다. 그대로 두는 것이 아름다움이고 올바른 보존법인 것을 행정관료들이 언제쯤 알게 될까? 원래는 4면을 판석을 세워 막은 뒤 그 위에 뚜껑을 얹었을 것이지만 두 개의 막은 벽은 없어지고 2매의 판석 위에 뚜껑들이 얹힌 도산리 고인돌의 뚜껑돌의 길이는 3.5미터이고 폭은 3.1미터, 두께는 30~38센티미터쯤 되며, 밑을 받치고 서 있는 두 개의 받침돌은 높이가 1.8미터쯤 된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추신: 일정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동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