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산행과 공주의 동학 전적지를 찾아서
3월 둘째 주 일요일인 9일 동학사에서 갑사에 이르는 계룡산 산행을 실시합니다. 우리나라 산천 중에 명산으로 이름 높은 계룡산의 이름난 사찰인 동학사와 갑사를 답사 한 뒤 동학 전적지를 찾아갈 계획입니다., 논산시 노성면의 윤증 고택과 동학농민군이 대패한 우금치, 그리고 곰나루를 찾아갈 이번 기행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서대전을 지나 유성에서 공주 쪽으로 접어들고 고개를 넘어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길목에 들어선다. 비 내린 뒤끝이라 나무숲 울창한 길은 눅눅하고 산봉우리들은 구름을 머금었다. 그래서 서거정은 “계룡산 높이 솟아 층층이 푸름 꽂고/맑은 기운 굽이굽이 장백에서 뻗어왔네/산에는 물 웅덩이 용이 서리고/산에는 구름 있어. 만물을 적시도다/내 일찍이 이 산에 노닐고자 하였음은/신령한 기운이 다른 산과 다름이라/때마침 장마 비가 천하를 적시나니 용은 구름 부리고 구름은 용을 좇는도다.”고 하였다.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동북쪽 기슭에 위치한 동학사는 724년(성덕왕 2년)에 상원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가 절을 창건하면서 상원사라 하였고 921년에 도선이 중창한 뒤 고려 태조 왕건의 원당 사찰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 유차단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를 짓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절 이름이 동학사로 지어진 것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며 학자였던 정몽주가 이 절에 제향 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1394년에는 고려 말의 학자 야은 길재가 동학사의 스님이었던 운선과 함께 단을 쌓은 뒤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올렸으며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399년에는 고려 유신 유방택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 이색, 길재 등 3은의 초혼제를 지냈다. 그 다음해에는 공주목사 이정간이 이곳에 와서 단의 이름을 삼은각이라 명명하였고 세조 때의 문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이곳에 와서 사육신들의 초혼제를 올렸다.
초혼제를 지낸 김시습
또 다음해에는 세조가 친히 이곳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 정순왕후, 안평대군, 금성대군,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과 사육신 그리고 세조 찬위로 억울하게 죽어간 280여명의 이름을 비단에 싸서 준 다음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세조는 이 동학사에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였고 인신과 토지 등을 내렸고 동학사라고 사액한 다음 승려와 유생들이 함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러나 1728년 신천영의 난으로 절과 초혼각이 불에 모두 소실되었으며 1864년에야 금강산에 있던 보신이 옛집을 모두 헐고 초혼 각 2칸을 지었으나 1904년에 초혼각은 숙모전으로 개창되었다.
절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계곡 건너편에 채마밭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밭을 매는 모습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스님들이 밭에서 즐거운 노동에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니 산행을 하겠다고 나선 내 모습이 문득 부끄러워진다. 숙종 때의 학자였던 남하정은 「동소집」에서 “아침에 동학사를 찾았다. 동학사는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절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으로 뛰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 목이 많았다. 지금은 절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7인 뿐인데 그나마 몹시 용련해서 옛일을 이야기할 만 한 자가 없다...”라고 기록했지만 지금은 좁은 터에 대웅전, 무량수각, 대방, 삼은각, 육모전, 범종각, 동학강원이 들어서서 남하정이 다시 살아온다면 놀라기도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이 동학사에는 동학강원이 있어 청도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도량이 되어있다. 1700년 이 곳을 찾았던 송상기는 동학사 문루에 앉아서 이곳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처음 골짜기 어귀로 들어서자 한 줄기 시내가 바위와 숲 사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데, 때로는 거세게 부딪쳐 가볍게 내뿜고 때로는 낮게 깔려 졸졸 흐른다. 물빛이 푸르러 허공 같고 바위 빛도 푸르고 해쓱하여 사랑할 만하다. 좌우로 단풍과 푸르른 솔이 점을 찍은 것처럼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마치 그림과 같다. 절에 들어서는데 계룡의 산봉우리들이 땅을 뽑은 양 가득하고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쭉 늘어서 때로는 짐승이 웅크린 듯 때로는 사람이 서있는 듯하다.
절이 뭇 봉우리 사이에 있는데다 보이는 곳의 흐름이 좁고 험하여 절 앞의 물이며 바위가 더욱 아름답다. 거꾸로 매달린 것은 작은 폭포고 물이 빙 돌아나가는 곳은 맑은 못이다.”
그러나 이 절은 모두 다 불타고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눈여겨볼 문화유산이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하지만 이절에는 전주사람인 창암 이삼만이 쓴 동학사 현판이 남아있다. 이삼만을 두고 오세창(吳世昌)은『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에서 이렇게 평했다.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베에다 글씨 연습을 했는데, 베가 검어지면 빨아서 다시 쓰곤 하였다. 비록 질병에 걸렸을 때라 하더라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천 자(千字)씩 썼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닳아 뜨려 구멍이 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집안이 원래 부유했으나 글씨 공부로 인하여 쇠락하였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점, 한 획을 1개월 씩 가르쳤다.”
오뉘탑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고
오뉘탑으로 가는 길은 극락교로 가지전에 오른쪽으로 난 가파른 계단 길이다. (...)
산길에는 넓적한 돌들이 깔려있으며, 나무숲은 울창하다. 한 이 십분 정도 올라가 배낭을 벗고 아무렇게나 앉는다. 장교완, 양순덕, 홍현희씨와 유두날에 만들었던 유두 밀떡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생각한다.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인생이라는 구비길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 차례 바뀐다. 우리들 역시 몇 년 동안에 걸쳐 산이면 산으로 들이면 들로 역사와 문화의 현장들을 찾아다녔던 이 시절이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까?
그래서 헤밍웨이가「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이 시절이 꿈결 같은 시절이나 의미가 있었던 시절로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갈까? 나를 따라오던 계곡의 물소리가 사라지면서 잔잔한 바람이 분다. 잠시 머물러 서서 지나온 길을 내려다본다. 어지러운 돌계단 사이로 흔들리는 가녀린 나뭇잎파리 그리고 나뭇잎 사이를 헤집고 내려앉은 여름 햇살이 형형색색의 모자이크처럼 바윗돌 사이로 어지럽히고 곧이어 작은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에서부터 2~30분쯤 오르자 널찍한 터에 남매탑이 보인다. 청량사 터에 세워진 두 개의 탑 중 7층탑을 오래비탑, 5층탑을 누이탑이라고 부른다. 이 탑들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있다. 이 근처의 토굴에서 도를 닦던 백제 왕족 하나가 이곳에 와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어느 겨울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주었다. 호랑이는 그 보답으로 한 여자를 물어다 놓고 사라져 버렸다. 그는 여자를 지극히 간호하여 살렸지만 상주에 살고 있던 여자가 혼례를 치르고 신방에 들기 전에 호랑이에게 물려왔다는 것이다. 왕족은 여자를 이튿날에 데려다 주고자 했으나 밤새 눈이 많이 내려 하는 수 없이 한겨울을 날 수밖에 없다. 그는 밤마다 일어나는 욕망을 좌선과 염불로 잠재우고 아무 일없이 한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에 약속대로 그 여자를 고향에 데려다 주었으나, 그 부모가 딸을 다른 데로 시집보낼 수 없다하여 왕족은 하는 수 없이 의남매를 맺고서 함께 수도하여 훌륭한 스님이 되어 입적했다.
뒤에 그 제자들이 그들의 불심을 기려 나란히 탑을 세우고 이를 남매탑으로 불렀다.
그러나 오층석탑은 백제 탑 양식으로 보이고 칠층석탑은 그보다 훨씬 뒤의 것으로 보여 위에 언급한 전설과 탑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온 사람들은 땀을 닦으며 부는 바람을 맞고 있고 우리들은 상원암의 약수에서 물 한바가지를 받아 마신다. 땀을 흘린 다음에 마시는 한 바가지의 물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다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
삼불봉 고개에 닿는다. (...)
계룡산은 예로부터 계람산, 옹산, 서악, 중악, 계악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고, 통일신라 이후에는 신라 5악 중의 서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을 설치 봄가을에 산신제를 올렸다. 또한 계룡산이라는 이름을 계곡의 물이 쪽빛처럼 푸른데서 연유한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계룡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4대 진산으로 일컬어 왔다.
계곡의 물은 쪽빛처럼 푸르고
천황봉에서 삼불봉까지의 산세가 닭 벼슬을 쓴 용의 모양이어서 계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 산에도 팔경이 있다. “연천봉의 낙조와 관음봉의 한가로운 구름, 천황봉의 일출, 장군봉 쪽의 겹겹이 포개진 능선 그리고 세 부처님을 닮았다는 삼불봉의 설화, 오뉘탑의 달, 동학사 계곡의 신록, 갑사계곡의 단풍이 어우러진 계룡산은 풍수지리상으로도 대단한 명산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이 산기슭에 도읍을 청하고자 하였고 그 뒤에는 정감록이라는 금서비기가 나왔다. 정여립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은 정감록(鄭鑑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감결에서 ”이심이...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백년의 땅이다“라고 하여 ”한양에 도읍한 이조 뒤에는 계룡사에 도읍한 정씨 왕조 8백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정공은 “계룡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씨와 우씨가 수족과 같으리라”하여 개국까지의 상황을 내다본 것이라고 한다. 계룡산 신도안에는 그러한 정감록 사상과 변혁사상에 힘입어 수많은 종교사상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1970년대의 정화작업이 있기 전까지 종교단체의 수가 1백여 개에 이르렀다.
삼불고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다시 길을 나서서 우거진 나무 숲길을 걸어서 신흥암에 닿았다. 신흥암은 중창불사가 한창이었으며 그 뒤에 천진보탑이 서 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400년 만에 중인도의 아육왕이 구시나국에 있는 사리모탑에서 부처의 사리를 발견하여 서방 세계에 분포할 때 비사문천왕을 보내어 계룡산에 있는 이 천연적인 석탑 속에 봉안하여 두었다고 한다. 이 석탑을 백제 구이신왕 대 발견하여 천진보탑이라고 하였고 그 뒤편에 솟아있는 수정같이 고운 수정봉은 갑사구곡의 하나이다.
개울물 소리를 벗 삼아 미륵골을 20여 분 내려왔을까 용문폭포가 나타났다. 연천봉 북서쪽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이곳으로 흘러 폭포를 이루었는데 높이가 10여 미터쯤 되는 용문폭포는 장마철이라서 그 물줄기가 장대하다. 폭포 옆에 있는 큰 바위굴이 있고 그 속에서 떨어지는 감로수가 등산객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한다. 그 폭포 주변에는 대학생인 듯싶은 젊은이들이 몇 십 명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다시 15분쯤 걸어가자 목탁소리 들리고 갑사에 닿는다.
갑사(甲寺)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절로서 화엄종의 10대 사찰중하나이다. 420년(구이신왕1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였고 그 뒤에 신라의 의상대사가 고쳐지었다는 이 절은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렸고 같은 해에 인조가 다시 세웠다.
갑사에는 대웅전, 강단, 대적 전, 천불전 같은 절 건물들과 암자들이 열 채쯤 들어서 있는데 원래의 갑사는 지금의 대웅전이 서있는 자리가 아니라 개울 건너 대적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나라 안에 칠장사와 청주 용두사지에만 있는 철당간지주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구리로 만든 종과「원인석보」의 판목이 있고 약사여래 돌 입상, 부도탑 등의 지방문화재들이 있다.
갑사는 또한 봄 마곡 추 갑사로 불릴 만큼 가을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지만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갑사는 그윽하게 우거진 나무숲들로 하여 찾는 이들의 감탄사를 자아내는 절이다. 갑사에 도착했을 때 1시가 넘어 있었다.
갑사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열 두 시쯤이면 만나기로 했던 총무스님에게 공양을 부탁할 수도 있지만 너무 늦었다. 어느새 구름 걷히고 햇살은 온 천지에 내려 쪼이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이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갑사 강당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95호인 갑사 강당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식 안판 2출목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강당의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역시 유형문화재 10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1.8미터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의 다포집이다. 이 절에는 조선 1584년 선조 때 국왕의 성수를 축원하는 기복도량인 갑사에 다른 목적으로 만든 동종이 있다. 높이 131미터에 입 지름이 91미터인 이 종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종은 신라종과 고려 종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반의 동종의 양식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동종을 보고 다리를 건너면 아름다운 갑사 대적전이 있고 그 앞에 보물 제257호인 갑사 부도를 만난다. 부도의 모습은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는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8각의 높직한 지대석 위에 3층으로 구분되는 지대석이 놓였는데 기단의 사자조각은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 위로는 꿈틀거리는 구름무늬 조각 위에 천인들이 악기를 타고 있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며 조각 내용들이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부도에서 대나무 숲 우거진 길을 내려오면 갑사 당간지주와 만난다. 석조 지주와 더불어 보물 제256호로 지정된 갑사 당간지주는 원래 28개의 철통이 이어져 있었는데 조선조 말 고종 30년(1893년) 벼락을 맞아 4개가 부러져 24개만 남아있다. 이 철당간지주는 그 조각 수법으로 보아서 통일신라 중기였던 문무왕 20년(680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록은 없다. 개울을 건너자 민박집에선 손님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고 우리들 역시 밥이 한울이고 한울이 밥이라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정식당으로 발길을 옮겨 동동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바라본 계룡산이 마치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커가는 듯이 보였다.
<신정일의 사찰기행>에서
지금 공주(公州) 교육대학(敎育大學) 뒤 봉황산(鳳凰山) 마루에 있던
관(官)․일(日) 혼성부대가 농민군의 포위 공격에
쫓기어 무기 버리고 성외(城外)도망간 이야기
그러나 무슨 소용이랴
역사도 울고
산천초목(山川草木) 울었다
공주(公州) 우금티
황토흙 속 유독 아카시아가
많은 고개였어
어느 여름
땀 흘리며 버스로 올라가는
이 고개는 매미소리뿐이었지
신동엽 시인이 ‘금강(錦江)’에서 노래한 대로 우금치 고개는 이 나라 어느 산이나 있음직한 야트막한 산이다. 소만한 금이 묻혔다고 해서 우금치라고도 하고 소를 몰고 넘지 못한다고 해서 우금고개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이 고개에 포장도로가 뚫려 있고, 그래서 공주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공주로 넘나드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끊일 날이 없다.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이 우금고개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가 세웠다. “5.16 혁명 이래의 신생 조국이 새삼 동학농민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창돌을 보게 된 만큼…”이라는 글귀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으켰던 군사 쿠데타를 성스러운 동학농민혁명에 비유한 것이었다.
탑의 뒷면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짓이겨져 있다. 또 하나 지워진 이름이 있으니 천도교 교령을 지냈던 최덕신이 그 이름이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박정희를 인정했으며, 그 덕분에 음으로 양으로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의 눈에 나서 망명을 하였으며 훗날 그는 북으로 들어가 천도교 교령을 지냈으며 그의 아내는 몇 년 전 북한 방문단 단장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만물이 가고 만물이 온다
지금 여러 가지로 재평가되고 있지만 대통령 박정희는 가장 총애했던 부하 김재규의 총에 1979년 12월 26일 이 세상을 달리 했고 최덕신은 북녘 땅에서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뒤를 이어 천도교령을 지냈던 오익제도 북으로 들어갔다.
바라보면 평화롭기 그지없는 저 공주시내와 이 산자락 우금고개 견준봉 일대에서 농민군과 연합군이 사활을 건 전투를 며칠간이고 계속했다.
농민군은 이인과 판치를 선두로 제2차 공격을 시작하였다. 판치를 지키던 구상조 부대와 이인을 지키던 성하영 부대는 농민군의 막강한 공격력에 쫓기어 공주성으로 철수한 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공주 방어에만 달라붙었다. 효포, 웅치, 우금치에 일본군과 정부군이 배치되었고 내포 방향에 있던 일본군도 공주로 합류했다.
치열했던 우금치 전투
드디어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삼면으로 포위한 다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전봉준은 몸소 가마에 올라타고 홍개를 휘날리며, 기를 들고 태평소를 불며 전선을 총지휘했다고 한다. 그 때의 상황을 관군의 기록인 <선봉진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아흐레 날이 밝아서 적세를 상세히 탐정한 즉 각 진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두루 잡기를 쫓고 동쪽 판치 후록으로 부처 서쪽 봉황산 후측에까지 30~40리에 걸쳐 산위를 열진하여 사람이 병풍을 두른 것 같아 세력이 심히 창궐했다.”
또한 당시의 관보는 그 날의 광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밤 농민군 진지의 불빛이 수십 리를 서로 비치고 인산인해로 마치 대하의 모랫 수에 비할 만하다.” 동학농민군과 정부, 일본, 연합군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싸움에 돌입한 것이다. 농민군은 끊임없이 우금치를 향해 내달렸고, 연합군은 우금고개 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그 처절한 싸움을 관군의 선봉장 이규태는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아, 그들 비류의 몇 만의 무리가 연연 4~5십리에 걸쳐 두루 둘러싸고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고봉을 점거하여 등에서 소리치면 서에서 따르고 좌에서 번쩍하면 우에서 나타나고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르니 그들은 어떠한 의리와 담략으로 타이르랴. 적정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
또한 <갑오관보>에는 “일군과 관군이 산척에 둘러서 일시에 총탄을 퍼붓고 다시 안쪽으로 몸을 숨기고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척에 올라 총탄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기가 4~5십 차례가 되니 시체 쌓인 것이 산에 가득하다.”고 적고 있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죽어버린 과거는 죽어버린 그대로 묻어 두라고. 그리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과거가 없이 어떻게 현재가 있으며 미래가 있겠는가.
김준태 시인의 말처럼 어두운 과거를 묻고 또 물을 때, 진실로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그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닐까. 아아, 우리들이 어찌 갑오년의 우금치 싸움을 잊겠는가.
칼과 낫과 몽둥이를 들고 물밀 듯 산으로 올라갔다가 짚단처럼 쓰러지고 또 쓰러짐을 그 쓰러짐을 보다 못한 아낙네들까지 치마에 돌을 날라다 주었던 그 싸움을 우리 어찌 잊겠는가. 훗날 전봉준은 공초에서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주 감영은 산으로 둘러 쌓이고 강을 끼어 지리가 유리한 형세를 가진ㅜ고로 이곳에 근거하여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병을 용이하게 격파하지 못함에 공주에 들어가 일본병에게 격문을 전하여 대치코자 하였으나 사세가 참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고로 제 1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 자가 불과 3천 명이요 그 후 또 2차 접전 후 점고한 즉 5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신정일의 <금강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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