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동학사에 갔다.남매탑을 지나 갑사에 이르는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밤새워 내린 비가 주절 주절 내리는 가운데 출발했는데, 동학사에 접어들면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동학사 주차장에서 우리 땅 걷기 도반들을 만나며 바라본 계룡산은 온통 설산이다.
겨울의 한복판에서 눈이 내린 길을 걸어가게 되었구나.
동학사 가는 길에 들어서자 비 내리다가 눈이 내리고 2십년전과는 너무도 변한 동학사는 고요했다.
숙종 때의 학자로 이 절을 찾았던 남하정은「동소집」에서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침에 동학사를 찾았다. 동학사는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절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으로 뛰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 목이 많았다. 지금은 절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7인 뿐인데 그나마 몹시 용련해서 옛일을 이야기할 만 한 자가 없다...”
지금은 그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좁은 터에 대웅전, 무량수각, 대방, 삼은각, 육모전, 범종각, 동학강원이 들어서서 남하정이 다시 살아온다면 놀라기도 할 것이다. 그 뿐인가. 이 동학사에는 동학강원이 있어 청도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련도량이 되어있다.
이곳을 찾았던 송상기 역시 동학사 문루에 앉아서 이곳의 풍경을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 골짜기 어귀로 들어서자 한 줄기 시내가 바위와 숲 사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데, 때로는 거세게 부딪쳐 가볍게 내뿜고 때로는 낮게 깔려 졸졸 흐른다. 물빛이 푸르러 허공 같고 바위 빛도 푸르고 해쓱하여 사랑할 만하다. 좌우로 단풍과 푸르른 솔이 점을 찍은 것처럼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마치 그림과 같다. 절에 들어서는데 계룡의 산봉우리들이 땅을 뽑은 양 가득하고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쭉 늘어서 때로는 짐승이 웅크린 듯 때로는 사람이 서있는 듯하다.
절이 뭇 봉우리 사이에 있는데다 보이는 곳의 흐름이 좁고 험하여 절 앞의 물이며 바위가 더욱 아름답다. 거꾸로 매달린 것은 작은 폭포고 물이 빙 돌아나가는 곳은 맑은 못이다.”
그가 보았던 동학사는 그 뒤 많은 변모를 겪었다. 이 절은 모두 다 불타고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눈여겨볼 문화유산이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하지만 이절에는 전주사람인 창암 이삼만이 쓴 동학사 현판이 남아있다. 이삼만을 두고 오세창(吳世昌)은『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에서 이렇게 평했다.
“어릴 적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 베에다 글씨 연습을 했는데, 베가 검어지면 빨아서 다시 쓰곤 하였다. 비록 질병에 걸렸을 때라 하더라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천 자(千字)씩 썼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벼루 세 개를 닳아 뜨려 구멍이 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집안이 원래 부유했으나 글씨 공부로 인하여 쇠락하였다. 글씨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점, 한 획을 1개월 씩 가르쳤다.”
고려 때의 학자로 정몽주. 이색과 함께 삼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은 길재와 조선 초기의 문장가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절이 동학사였다. 동학사를 뒤에 두고 하얗게 눈 덮인 산길을 숨이 가쁘게 넘어 두루 살펴 본 남매 탑과 갑사,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흔적들이 이 밤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것은 금세 추억이 되어 버린 그 길들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인가? 눈 속에 미동도 않고 서 있던 겨울나무들의 속삭임 소리가 귀에 쟁쟁했기 때문인가?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은 겨울 계룡산은 지금 어둠 속에 잠겨 있을 것인데,
갑오년 삼월 열흘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차마고도인 새비재길과 화절령을 걷는다. (0) | 2014.05.05 |
---|---|
전통 꽃상여가 고인돌과 청 보리 밭 사이를 지나가고 (0) | 2014.05.05 |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두 번 째 -함평 지나 영광 법성포로 가는 길- (0) | 2014.04.17 |
계룡산 산행과 공주의 동학 전적지를 찾아서 (0) | 2014.04.17 |
꽃피는 봄날에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을 걷는다. (0) | 2014.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