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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무계정사

산중산담 2015. 5. 22. 08:35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무계정사(武溪精舍)

 

 

답사일 : 2013년 11월 30일

누구랑 : 우리 부부

 

 

무계정사(武溪精舍)  ‘안평대군 이용 집터’ ,개칭(2003년)     창의문로7길 28-4 (부암동)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  

 

대문 사이로 어렵게 촬영한 무계동 암각된 바위 - 안평대군의 친필로 추정된다

 

부암동 무계동은 자하문 밖 서쪽 골짜기에 있었던 마을로 청계동천靑溪洞天이라 불릴만큼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중국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있는 계곡처럼 생겼다 해서 무계동이 되었는데

1447년 안평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의 탄생 무대인 곳이다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바위에 새긴 글씨 ‘무계동(武溪洞)’이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현진건 집터에서 본 무계정사터

 

김종서 등 문신들과 함께 수양대군에 맞섰던 안평대군은 단종 즉위 후 이곳 무계정사 터에서 정변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시켰고,

세종 사후, 안평대군은 수양대군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권력의 추는 수양대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무계정사가 지어진 후에는 문인들을 모아 시회를 열었고 단종 즉위 후에는 무인들을 모아 활을 쏘며 단련하였다는 곳이었다

한편으로는 무계정사에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용산 강가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선비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안평대군이 정치를 피해 풍류를 즐기던 무계정사(武溪精舍)는  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고도 불리웠다.

결국 사람들에 의해 흥룡지지(興龍之地-왕기가 서려 있어 역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땅)라고 안평대군이 역모로 몰려서 사약을 받고 죽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단종 1년(1453) 이후 완전히 헐리게 되고 몽유도원도의 꿈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현진건집터에서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무계정사터가 보인다

 

조선 초기 세종의 셋째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꿈에 박팽년 등과 함께 노닐던 무릉도원을 본 후

당대 최고 화가 안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리게 했다는 작품인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꾼 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는 '몽유도원도'.

그리고 3년 후, 유람 중에 그는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이곳에서 발견하고 집(무계정사)을 짓고 '무계동'이라 이름붙였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종이 승하한 5달 뒤인 1450년 9월경에 무계정사가 지어진 탓에 결국 이곳은 몽유도원도의 꿈처럼  은자로서 머물며 노닐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하였다.

꿈 속의 경치를 잊지 못하고 현실에서 그런 곳이 있는지 찾아 헤매던 안평대군이 마침내 꿈 속에서와 같은 경치를 찾았다며

그림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 이곳까지 왔다가 “여기가 바로 꿈 속에 본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정자를 짓고 글을 읊은 것이 별장의 유래가 되고 있다

 

전신주 사이로 본 무계정사

 

지금은 과거 '무릉'의 풍경과 흡사했다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왕산은 그대로 있으니..

 

2009년 자료를 보면 일본 덴리 대학의 금고속에 들어가 있던 ‘몽유도원도’가 14년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선보였는데

9일간의 전시에 7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최장6시간을 기다렸다가 관람할 수 있었다는 ‘몽유도원도 신드롬’을 낳았다.

꿈속에 본 그림을 볼 수가 없었으니 얼마나 보고 싶었겠는가?  그것도 실제로 직접 눈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도 소중한 국보를 일본에 빼앗기고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몽유도원도의 실제 배경이 이렇게 방치하고 있으니..

 

 

                  초보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