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2015년 석가 탄신일에 떠나는 삼사기행, 문경 봉암사, 포항 오어사, 속리한 법주사

산중산담 2015. 6. 25. 22:26

석가탄신일에 떠나는 삼사기행, 문경 봉암사, 포항 오어사, 속리한 법주사

 

 

2015년 석가탄신일에 떠나는 삼사三寺기행이 예정대로 실시됩니다. 24(일요일)에는 동해 바닷가 길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포항의 구룡포에서 호미곳에 이르는 해파랑길과 원효와 혜공의 자취가 서려 있고, 경치가 빼어난 오어사를 찾아갑니다.

25일인 석가탄신일(월요일)에는 석가탄신일에만 산문이 열리는 절인 문경의 봉암사와 속리산 법주사, 그리고 나라 안에 제일 아름다운 사넝 중의 한 곳인 삼년산성의 보은사를 찾아갈 예정입니다.

희양산 봉암사는 산문을 굳게 닫아놓고 일반인의 접근을 스님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켜낸 이 땅의 마지막 청정도량이자 가장 폐쇄성을 지닌 절이다. 봉암사는 1982년 조계종 종립선원(특별 수도원)으로 지정되어 참배하러오는 봉암사 신도 외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사찰 소유림과 법당 4km이내의 경내지는 어떤 위락시설도 들어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등산로도 이용 할 수가 없다.

보통 일반사찰에서는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각각 3개월을 수행하고 나머지 기간은 해제를 한다. 그러나 봉암사는 해제 기간 없이 계속 참선과 수행을 한다.

봉암사는 경상북도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噫陽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써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의 한 곳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인 이 절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이 창건한 절이다.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 비문에 의하면 도헌은 성이 김씨로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며, 서라벌 사람이다 .경주 사람인 김찬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불도에 뜻을 두고 부석사에서 출가하였다.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 있으면서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열일곱에 구족계를 받은 그는 정진에 힘썼고, 그의 나이 스물에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임금이 경주에 와서 있을 것을 간곡히 요청했는데도 수도인 경주에 나아가지 않고 수행정진에만 힘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심충이라는 사람이 희양산에 있는 땅을 내어놓으며 그곳에 절을 짓기를 청하자 와서 보고는이 땅을 얻은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일 것이다. 이곳에 승려들이 살지 않는다면 이곳은 도둑들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고서 이곳에 절을 지었는데 이절이 희양산문의 본 찰이 된 것이다. 경문왕이 사신을 보내어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헌강왕이 왕사를 삼았으나 역시 사양하고서 이 절에서 입적하니, 59, 법람이 43년이었고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의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려진 시호이다.

봉암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 지증대사가 이 자리에 절을 짓기 위해 큰 연못을 메우려 하는데 그 자리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 지증대사는 신통력으로 그 용을 구룡봉으로 쫓은 뒤에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봉암사를 세웠다는데, 백운곡白雲谷에 있는 계암이라는 바위는 봉암사를 창건할 당시 날마다 그 바위 위에서 닭 한 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이른다고 한다.

그 뒤 이 절은 935(태조18)에 정진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였고 정진대사원오탑(靜眞大師圓五塔) 및 탑비가 보물 제171호와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진국사탑비는 규모가 지증대사탑비와 같으며, 일주문을 100m 앞둔 곳에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건너가면 밭 가운데 있다. 한편 희양산문曦陽山門은 선종 9산문 중의 하나로 정진국사靜眞國師의 긍양兢讓이 희양산의 봉암사에서 선풍을 선양하여 하나의 문파를 이루었으므로 희양산선문 또는 희양산선파라고 부른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는 기화(己和)1431(세종13)에 절을 중수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宜>를 저술하였다. 그 뒤 1674(현종 15)화재로 소실된 뒤 신화(神和)가 중건하였고, 1915년에는 세욱(世旭)이 퇴락해가는 건물들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신라 경순왕이 한때 피신한 것으로 전해지는 극락전이 있는데, 건물의 가구방법(架構方法)이 이채롭고 천장 꼭대기에 석탑 상륜부의 모양으로 보주(寶珠)를 얹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사문(寺門)과 나란히 있는 요사채 이외에는 모두가 신축된 건물로서 절 중앙 상부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오른쪽에는 규모가 큰 선원(禪院)이 있으며, 넓은 경내 도처에는 수채의 건물이 서 있으나 다른 절과는 달리 편액을 걸고 있지 않다.

이 절의 오른쪽에는 보물 제137호인 지선의 사리부도 지증대사적조탑(智證代師寂照塔)과 보물 제138호인 지증대사적조탑비가 있다.

그리고 절 앞 뜰에는 지증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제169호의 아름다운 5층 석탑이 있는데, 기단구조에서 특이함을 보이며 상륜부가 완존함으로써 주목되는 탑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3만 이상의 인파가 몰린다는 봉암사이다. 번잡하기 전 이른 아침 산사를 둘러보고 청량한 기운과 함께 아침 공양을 마치고 빠져 나와 팔공산 자락으로 들어 갈 예정이다.

오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그 뒤 신라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함께 이곳의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방변(放便)하였다. 그러자 그 똥이 물고기로 변하여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혜공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저 놈이 바로 내()고기()로다고 했고, 원효 스님도 역시 내 고기다.‘ 라고 했다는 설화에 의하여 오어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유적에 의하면 자장(慈藏)과 혜공·원효·의상(義湘)의 네 조사(祖師)가 이 절과 큰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었으므로 이들 네 조사의 행적과 연관짓고 있다.

원효암 가는 길과 오어사 뒤편에 날렵하게 지은 자장암이 일품이다.

이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설선당(說禪堂칠성각·산령각 등이 있고, 이 중 대웅전을 제외한 당우들은 모두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이 절의 대중전에 원효대사의 삿갓이 남아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삿갓의 높이는 1척이고 지름은 약 1.5척인데 뒷부분은 거의 삭아버렸다. 하지만 겹겹으로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삿갓은 마치 실오라기 같은 풀뿌리를 소재로 하여 짠 보기 드문 것이다.

이 절의 문화유산으로는 불계비문(佛契 碑文)과 염불계비문(念佛契碑文그리고 운제산단월발원비문(雲梯山檀越發願碑文) 등과 부도가 있다.

청화산 건너편에 속리산(俗離山)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속리산은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이라고 불렀고 중사(中祀:고려와 조선시대 국가적인 규모의 사전(祀典)에서 대사(大祀) 다음가는 제사)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 위에 큰 구멍이 가마솥만한 곳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에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한강)으로 들어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여 기묘한 석봉들이 구름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아름다운 연꽃, ()의 아칭) 같아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이 법주사 일대의 암자를 돌아보고서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멀리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멀리한다.’고 노래한 속리산(1,051m)은 백두산에서 비롯된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인 보은군에 자리 잡고 있다.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속리산은 천황봉, 비로봉, 입석대, 문장대, 관음봉 같은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며 기기묘묘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들과 함께 국보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법주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불우조에, ‘속리사 : 속리산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속리산에서 속리사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김구용(金九容)의 시에만 남아 있다. ‘달마암(達磨岩) 가에 등불 하나 밝았는데, 문 열고 향 피우니 마음 다시 맑아라. 혼자 깊은 밤에 잠 못 이루니, 창 앞에 흐르는 물, 솔 바람소리에 섞여 들리네.’

한편 속리산 하면 떠오르는 절 법주사를 두고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 박효수(朴孝修)는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남겼다.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 장갑(長岬)의 신령스런 근원 몇 겹인고. 문장대는 천고의 이끼 그대로 있고, 우타굴(于陀窟) 그늘 만 그루 소나무일세. 용이 탑 속으로 돌아가니 진골이 남았고, 나귀가 바위 앞에 누웠으니 성종(聖鐘)을 찾네. 길이 삼한(三韓)을 복되게 하는 건 누가 주인인가. 산호전(珊瑚殿) 위에 자금용(紫金容:자금색의 부처의 몸빛)일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義信)이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갔다가 돌아와 창건한 절이다. 그 뒤 혜공왕 12년에 창건했고 모악산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면서 큰 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5층목탑 형식의 법주사팔상전(국보55)과 석련지(국보64), 쌍사자석등(국보64)이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

보은의 삼년 산성과 보은사

이곳 보은지역은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다투던 접경지역이었다. 보은의 북쪽에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석축산성인 삼년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신라 자비왕 13(470)에 상주의 사벌성(沙伐城)을 점령한 신라가 보은으로 나와 쌓은 것이다. 이 성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즉 삼년군 지역의 확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보은 일대를 삼년군(三年郡) 또는 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렀기 때문에 성 이름이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이 있다고 하여 오정산성(山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소지왕 8(486)에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아 경상도 일선(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장정 300명을 징발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민가 스무 가구쯤이 있어서 성 안의 마을을 삼년성 그리고 성 밑의 마을은 성밑이라고 불렀다는데, 민가는 성 밖으로 옮겨가고 현재 성 안에는 보은사라는 절이 하나 있을 뿐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