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열 두 번 째 -안산 시화호에서 김포시 월곶리까지

산중산담 2015. 6. 25. 20:43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열 두 번 째 안산 시화호에서 김포시 월곶리까지

 

갑오년에 시작한 서해안 걷기가 열두 번째로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에서 잠정 중단됩니다. 원래는 북한의 신의주까지 이어진 예정이었으나 분단 조국의 현실 때문에 조강포에서 배를 타고 벽란도 거쳐 서해를 올라 가리라던 계획을 조금 뒤로 미루고 휴전선으로 이어집니다. 5월의 정기기행(5월 둘째 주임, 오월만 초파일이 넷째 주에 있는 관계로 그렇습니다.)은 휴전선 기행은 고양,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춘천, 양구, 인제를 거쳐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안산의 시화호와 소래 포구, 인천의 제물포와 차이나타운, 그리고 강화를 마주보는 손돌목이 있는 김포 해변길, 그리고 강화대교에서 문수산성을지나 보구곶리로 이어지는 여정이 우리가 가야할 서해안 길입니다.

고기잡이와 소금을 구워서 이익을 취하고, 농업과 양잠에 힘쓰지 않으므로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유한 사람은 적다. 또 토지가 메말라서 자주 흉년이 들고 가난한 사람이 많아, 저속하고 인색한 풍속이다.” <여지도서>에 실린 인천도호부의 풍속조에 실린 글이다.

옛 이름이 매소홀현(買召忽縣)이었으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1949년에 인천시로 개편되었다. 계양산철마산장고개 등이 있으며, 인천의 진산 소래산蘇萊山?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소래산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과천의 수리산 서쪽 기슭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30 리에 이르러 소래산을 이룬다.“

비류(沸流)의 도읍터로 알려져 있는 문학산(文鶴山)의 정상은 평평하고 돌로 쌓은 성터가 있다. 이곳에는 성산봉수대지(城山烽燧臺地)가 있는데,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 하여 배꼽산이라고도 부른다.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사모지고개라고 하는데, ?여지도서?삼해주현(三亥週峴)’이라고 적혀 있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고개 위에 큰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마치 물동이와 같이 생긴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옛날에 그 구멍에는 삼해주(三亥酒)라는 술이 가득 차 있어 그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갈증을 풀었다고 한다. 이 술은 한 잔만 마셔도 갈증이 풀렸으므로 더 이상 마시지 않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한 잔 더 마신 뒤로 그만 술이 말라 버려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곳을 삼해주현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얘기도 남아 있다.

옛날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이 고개를 넘어 서해안의 능허대(凌虛臺)에서 배를 타고 떠났는데, 사신을 배웅하는 가족과 친지들이 이 고개까지 따라와서 멀어져 가는 사신을 크게 세 번 불렀다고 해서 삼호현(三呼峴)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또 사모재는, 이 고개만 넘어서면 울창한 숲이 나타나서 사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못내 그리워 사모한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능허대는 청량산 여록餘麓이 바다로 들어가는 주변에 있는 대로 백여 척의 높이로 삐쭉삐쭉 솟아 있는데, 그 위에는 30명 안팎이 앉을 수 있고, 큰 바다를 볼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인천에서 중국으로 가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당시 인천도호부에 있던 대진大津에서도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떠났던 사실이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아에서 서쪽으로 10리 다소면多所面에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하였을 때 백제에서 중국에 가는 길을 고구려가 막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내주萊州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곳 대진에 기녀바위(妓巖)가 있었다. 민간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 사신들이 순풍이 불면 띄우려고 나루터 주변에서 기녀妓女를 끼고 머물렀다. 배가 떠나는 날 기녀가 멀리 헤어지는 이별의 정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런 연유로 후대의 사람들이 비 바위를 기녀바위라는 뜻으로 기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1884년에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개항을 한 제물포는 서해안에 있는 작은 포구였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했던 이사벨라 비숍여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조수가 11미터나 오르내리는 제물포의 정박지는 낮 동안에 질퍽거리는 진흙 펄과 다름이 없다. 모래톱에 있는 좁은 도랑인 정박지는 현대적인 용량의 배 다섯 척을 수용할 수 있다. 진흙만이 현저히 눈에 띄고, 마을 뒤편의 낮은 언덕은 칙칙한 고동색이었으며, 부슬비까지 뿌리고 있었지만, 제물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나는 곧 제물포에 익숙해졌다. 그 후 4년 동안 여러 계절과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제물포를 찾을 때마다 나는 고향을 다시 찾은 듯한 그런 다정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정박지에서 바라보면,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 희게 필해지고 대부분 나무로 된 집들이 드문드문 불모의 언덕에 서 있었다.“

제물포의 지명 유래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옛 지명인 미추나 매소가 거친 들판(맷골) ’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는 뜻이라고 보고 있다.

제물포는 원래 고구려의 미추홀군이었는데 백제가 점령 한 뒤 372년부터 475년까지 100 여 년 간 중국의 동진, 송 북위와 내왕하는 근거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서 남해안과 개성을 잇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제물포진이 설치되어 수군만호가 주둔하였으나 효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그 뒤 효종이 북벌 계획을 수립하면서 제물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를 개척하였고, 유사시 임금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을 월미도에 지었으며 제물량濟物梁에는 수륙 양군을 배치하고 2척의 배를 대기 시켰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과 연결되는 중림도重林道의 종착역이었으며, 영종도를 연결하는 뱃길이 개설되어 있었다. 특히 삼남 지역의 조선漕船이 한강에 진입하기 전의 정박지였으므로 이곳에 원이 설치되었다(...)

김포와 강화 사이의 해협을 강화해협이라고 부르는데, 김포의 고구려 때 이름은 금포현(金浦縣)이며, 신라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서 장제군(長堤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그 뒤 조선 태종 13년에는 양천과 합하게 된다. 1895년 인천관찰부 통진군으로 강등되었던 김포는 통진부와 양천현을 편입하면서 김포군으로 되었다.

강화는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리건널 수 있을 만큼 좁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갑곶 양쪽을 지키면 섬 바깥은 강과 바다가 천연적인 요새지가 된다. 그런 연유로 고려 때 원나라 군사를 피해서 여기에다 10년 동안이나 도읍을 옮겨 고려왕조의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가 모두 손돌목을 거쳐 서울에 올라오는 까닭에 바닷길의 요충이라 하여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또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도 방영(防營)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시켜 지키게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기후는 바다가 가까워서 일찍 따뜻해진다. 간전이 3032결이요, 논과 밭이 반반이다라고 적혀 있는 김포군의 당시 호수는 318호이고, 인구가 651명이요, 군경은 시위군이 2, 선군이 59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성지(梁誠之)가 그의 시에서 지역이 고양과 닿았으니, 응당 술은 있으렸다. 강이 한수와 통했는데, 어찌 물고기 없으랴라고 노래했던 김포시에는 문수산가현산계양산 등이 솟아 있고, 그 아랫자락으로 굴포천계양천 등이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동국여지승람? 통진현편에 서쪽으로 갑곶을 등지고, 동쪽으로 세 봉우리를 바라본다. 푸른 바다가 오른편에 둘렀고, 큰 강이 왼편으로 지나간다는 김포군에 애기봉이 있다.

 

그 아랫자락에 한강의 하구에 있는 보구곶리는 한강의 하구이자 서해안 걷기의 종착점입니다. 이곳에서 서해안 겁기의 꿈을 잠시 접고 다시 신의주로 올라갈 그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서해안 걷기 잠정 중단하는 답사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