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구룡령 옛길을 넘어 낙산사에 이르는 길

산중산담 2015. 10. 28. 20:53

 

구룡령 옛길을 넘어 낙산사에 이르는 길

가을의 초입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길이 있다. 양양의 구룡령과 선림원지, 그리고 진정사지를 지나 낙산사에 이르는 길이다.

길이 아름답고 역사적 유래가 많아서 명승으로 지정된 구룡령 옛길을 고개의 정상에서 내려가 폐사지로 이름난 선림원지와 진전사지, 그리고 원효와 의상의 자취가 서린 관동팔경 낙산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이곳 설악산 자락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폐사지 진전사지가 있고 양양군 서면에 자리 잡은 미천골에 폐사지 선림원터가 있다.

길이 비좁기는 해도 설악을 바라보고 들어가는 골짜기 길은 가을이면 감나무에 매달린 붉디붉은 감들로 인하여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산이 더욱 깊어지기 전인 강현리에 신라 선문구산의 효시가 되었던 도의선사가 창건한 진전사터가 있다.

도의(道義)선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을 전한 신라의 고승으로 북한산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하며, 784년에 당나라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강서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지장(地藏)의 법맥을 이어받은 도의는 37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다가 귀국하여 선법을 펴고자 했다. 도의가 신라에 도입해온 선종은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동쪽에 전파한 것으로,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는 뜻이었다.

도의선사의 뜻은 다시 마조도일의 남종선(南宗禪)에 이르러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으로 이어졌다. “염불을 외우는 것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고 다닌 도의의 사상은 교종만을 숭상하던 당시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중생이 부처라는 도의의 말은 신라 왕권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에 다름 아니었으므로 마귀의 소리라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도의선사는 이곳에 와 40여 년 동안 설법하다가 입적했고, 그의 선법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에게 이어지고 다시 보조선사 체징(804880)으로 이어져 맥을 잇게 된다. 보조선사는 구산선문 중 전남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짓고 선종을 펼쳤는데, 그 뒤의 진전사에 대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도의선사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조선 초기에 폐사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절에는 국보 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전사지3층석탑과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진전사지부도가 있고, 진전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8년 해체보수되었으며, 건립 연대는 9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진전사지석탑에서 오르막 산길을 한참 오르면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되는 부도 앞에 이른다. 우리나라 부도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는 이 부도는 석탑의 2층 기단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 때문에 이 부도를 부도의 모습이 구체화되기 이전의 형태 즉 초기 부도로 보고 있다.

도의선사가 선종을 열기 전 의상, 원효, 자장 등 신라의 큰스님들은 어느 누구도 부도를 남기지 않았다. 화엄의 세계에서 큰스님의 죽음은 그저 죽음에 지나지 않았지만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선종에서 큰스님의 죽음은 붓다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다비한 사리를 모시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시도되는 부도였던 진전사지부도는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신부의 팔각당 양식은 당나라 초장사의 사리탑에서 빌려왔다.

미천골의 선림원지

응복산(1,360m)과 만월봉(1,281m) 아랫자락에 위치한 선림원지가 자리한 미천골은 선림원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이 너무도 많아 쌀 씻은 쌀뜨물이 계곡을 덮은 채 흘러내렸다 해서 쌀 미(), 내 천()자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폐사지 터로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포장 길이었던 길이 포장도로가 되고 길 아래로는 사시사철 맑은 계곡 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계곡을 2.5킬로미터쯤 들어가면 산비탈에 축대가 쌓여 있는데, 그 뒤에 선림원지가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선림원지는 804(애장왕5)에 순응법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 이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순응법사가 제작했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범종은 당시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월정사에 보내졌다가 한국전쟁 당시 월정사와 함께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다. 선림원의 조성 내력과 연대가 새겨져 있던 선림원지 동종은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빼어난 유물 중의 하나였다.

순응법사가 창건할 당시 이 절은 화엄종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문왕 때 고승 흥각선사가 이 절에 옮겨왔고 헌강왕 때 흥각이 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선종사찰로 전이해 간 것으로 보여진다. 흥각선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비의 파편과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선조의 아들 이우가 편찬한 신라 이후의 각종 금석문을 탑본한 책)에 의하면, 흥각선사는 경서와 사기에 해박하고 경전을 암송했으며 영산을 두루 찾아 선을 단련하고 수양이 깊어 따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선림원지는 그 당시 화엄종의 승려들이 대거 선종으로 이적한 사실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찰이었다. 1985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금당 터의 주춧돌이나 여타의 다른 유물들이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은 10세기 전반기에 태풍과 대홍수로 산이 무너져 내리며 금당, 조사당 등 중요건물들이 사라져버린 뒤 복원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림원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선림원지3층석탑(보물 제444), 선림원지부도(보물 제447), 선림원지흥각선사탑비(보물 제446), 선림원지석등(보물 제445) 등이 남아 있다. 선림원지3층석탑은 다른 유물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복원한 것이다.

선림원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홍천군 내면으로 넘어가는 아름다운 구룡령 옛길이 있다.

국가 명승 제 29호로 지정된 구룡령은 양양과 홍천 지방을 연결하는 길로서, 양양과 고성, 간성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갯길이었다. 산세가 험한 미시령, 한계령보다 산세가 평탄하여 사람들이 이 길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특히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였고, 고성 간성 양이의 선비들이 고거를 보기 위해선 꼭 넘어야 되는 길목이었다. 구룡령이라는 이름은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가 지쳐서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상대사가 만난 관세음보살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있는 낙산사(洛山寺)는 설악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바닷가에 이르러 산을 하나 이룬 그 아래 위치해 있다. 그 산 이름이 낙산으로 낙산 기슭에서 망망대해인 동해를 바라보고 지은 절인데 2005년 봄 동해안의 산불 때 홍련암과 의상대만 제외하고 소실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3대 관음 기도도량중의 하나인 낙산이라는 이름은 인도의 보타 낙가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이 절은 671(문무왕11)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의상이 관세음보살의 전신이 낙산 동쪽바닷가의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7일 동안 굴의 입구에서 기도를 하고서, 앉은 채로 물위로 뛰어들자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이 나타나 의상을 굴속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이 굴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수정염주 한 꾸러미와 여의보주 한 알을 주었다. 그것을 가지고 나온 의상이 다시 7일 동안 기도를 올리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앉은자리 위쪽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 의상은 쌍 죽이 솟아 있던 그곳에 금당을 짓고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짓고서 그때 받았던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셨다.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원효 역시 관세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던 중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설화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효가 양양부근에 다 왔을 때 흰옷을 입은 한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원효는 여자에게 벼를 줄 수 없겠는가?’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벼가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길을 재촉하던 원효가 개울의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빨래하던 물을 한바가지 떠주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냇물을 다시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에 서 있던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며 휴제호 화상아라고 부르짖으며 사라져 버리고 파랑새가 날아간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의아하게 여긴 원효가 낙산에 도착해보니 관음상 밑에 그 신발의 다른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서야 원효는 벼를 베고 있던 여인과 빨래하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깨달았고, 그 뒤에 원효가 의상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았다는 그 굴속을 찾아가려 했지만 풍랑 때문에 가지 못했다.

의상은 관음보살을 만나고 원효는 관음을 만나지 못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의상과 원효는 신라불교의 대표적 스님이면서도 서로 큰 차이가 있다. 의상은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종(華嚴宗)을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의 영험한 산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우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신라왕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