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다섯 번째 ‘인제 가면 언제 오나.’의 인제에서 건봉사까지
휴전선 기행 다섯 번째가 인제에서 고성의 건봉사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걷습니다. 아름답고 수려한 산 설악산 자락의 고을 인제군은 춥기로 소문난 향로봉이 있는 곳이고, 그만큼 군사요충지가 많은 곳입니다.
인제에서 진부령을 지나 건봉사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답사할 이번 여정은 추석관계로 둘째 주일에 실시되오니 참여를 바랍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인구밀도는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진 인제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통역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인제 하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말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임금이 난리를 피해서 이 고을에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서울의 형편을 궁금하게 여기어 몇 차례나 사람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자 다시 한 사람을 보내면서 “인제 가면 언제 오겠느냐”고 묻고 만일에 또 돌아오지 않는다면 “원통해서 못 보내겠다”고 했단다. 그 뒤로 이 말은 뜻이 바뀌어 인심이 순박한 이 고을에서 다른 곳으로 식구를 떠나보낼 때에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 말로 쓰였다가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요즈음에는 이곳이 워낙 깊은 산골인지라 다른 지방에서 이곳으로 갈 적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많이 쓴다.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그런지 나라 안에서 가장 면적이 넓으면서도 인구는 가장 적은 지역에 속하는 것이 인제군이다.
인제군에는 높이 1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들이 즐비하다. 전방지역의 기온을 얘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향로봉이 1,293미터이고, 응봉산 1,271, 설악산 1,708, 점봉산 1424미터에 이른다. 이처럼 높은 산들을 사이에 두고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과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높이 1,146미터의 도솔산, 1,316미터의 대암산 등을 사이에 두고 양구군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높이 1,436미터의 방대산, 1,118미터의 소뿔산, 1,443미터의 주억봉, 1,388미터의 구룡덕봉, 1,240미터의 가칠봉 등을 사이에 두고 홍천군과 맞닿아 있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 합강정合江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인제8경 중의 하나인 합강정 앞에서 내린천과 인북천이 합류한다. 그곳에서부터 강이 합해서 흐르므로 합강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인제 지역 최초의 정자인 이 합강정은 숙종 2년인 1676년에 건립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6년에 중수하였다.
“관아의 북쪽 5리에 있다. 한 물줄기는 기린현麒麟縣에서 흘러오고, 한 물줄기는 설악산에서 흘러와 원통역에 이르러 서화수와 합류해 정자 앞에 이르는데, 합류한 강의 이름은 미륵천彌勒川이다. 동쪽으로는 맑은 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흙으로 이루어진 토산土産을 등지고 있다. 구불구불 뻗어 와서 끝이 끊어진 곳에서 낭떠러지를 이루어 가파르게 솟아 있다. 언덕 위는 평평하게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에 정자가 있는데 맑은 연못을 굽어 바라보면 경치가 시원하고 상쾌하여 산골 고을의 뛰어난 경치가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 지금은 다만 옛터만 남아 있다. 병자년 겨울에 십자각十字閣 5칸을 지었다.”
1760년 간행된 《여지도서》에 실린 글이다. 1865년(고종 2)에 6칸으로 중수되었고,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진 것을 1971년에 6칸 정자로 다시 건립하였다. 지금의 합강정은 1996년 국도 확장 공사 때 철거하였다가 1998년 6월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목조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한계산의 아름다움
한계사의 동쪽 40리에 백운암白雲菴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사방에 아름다운 봉우리가 담장처럼 둘러서 있고, 다니는 길이 험준하여 사람의 자취가 거의 이르지 않았다는 백운암은 자취도 없고 관아의 동쪽에 있었다는 은적암隱寂庵이라는 암자도 사라진지 오래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에 이르고, 한계령을 넘으면 양구에 이르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에 닿는다.
강원도청에서 펴낸 ?강원총람?에 의하면, 1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인제군에 96개가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대청봉을 포함한 양양군과 속초 쪽의 산, 즉 외설악을 설악산으로 불렀고, 인제군 쪽의 산, 즉 내설악은 한계산으로 불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내외설악을 합쳐서 설악산으로 부르는데, 한계산이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산 위에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곧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니 흐름이 수백 척의 높이에 달려 있으므로 바라보면 흰 무지개가 하늘에서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으로부터 동쪽은 좌우 쪽이 다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고, 산골 물을 가로 세로 흘러서 건너는 것이 무려 36번이나 된다. 나무들은 갈대 자리를 말아 세운 듯한 것이 위로는 하늘에 솟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서 기괴奇怪하기가 형언形言할 수 없다. 너무 높아서 새도 날아가지 못하며, 행인들은 절벽이 떨어져 누르지나 않을까 의심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는데 반석이 앉을만하다. 또 동쪽의 수리數里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고, 가느다란 작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다.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높은 봉우리들은 높이 빼어나서 용龍이 마주 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으며, 층대層臺를 여러 층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의 으뜸이 된다.”
이 산 위에 한계고성(寒溪古城)이 있다. 고려 후기에 조휘(趙暉)가 몽고군을 끌고 와서 공격하여 고려의 군대를 섬멸하고 화주 이북(함경남북도) 지방을 원나라에 바쳤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至正 十八年(지정 18년)”이라는 다섯 자를 새긴 현판이 발견되었는데, 지정이란 원나라의 것을 인용한 고려 공민왕 때의 연호로, 공민왕 7년(1358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한계고성 부근은 고구려와 신라가 군사대결을 벌였던 곳이었는데, 이를 통해서도 역사적 대결구도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문 자리만 남아 있는데, 무너져서 바위굴처럼 되어 있다. 한계산 아래에는 대승폭포가 있고 장수대 어귀에 옥녀탕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 장수대를 지나 한계령을 넘던 길에 시 한 편을 남겼다.
울내여 너 피 흘린 물아
장수들 칼 씻은 물아
목메어 우는 물가에서
나도 목멜 줄 알았다면
아뿔싸 이 길로 왜 오지
딴 길로 재를 넘을 걸.
한편 용대리의 설악산 자락에는 신라 진덕여왕 1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백담사(百潭寺)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시인이자 스님이었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었고, 현대사 속에선 5공화국 청문회가 끝난 뒤 전 대통령인 전두환씨가 머물렀던 곳이다.
인제군 남면 김부리金富里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자취들이 여러 곳이 있다. 그,가 이곳에 와 있었다고 해서 김부왕촌, 또는 김부동이라고 불린 이 마을의 하단지골 북쪽 산 밑에 옥새바우라는 바위가 있다.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김부대왕이 이곳에 옥새玉璽를 감췄던 곳이라고 한다. 여러 빛깔의 뱀이 가끔 나와 돌아다니는데, 옥새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곳 김부리의 거릿말 북쪽에 김부대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대왕당大王堂이 있다. 김부대왕을 위하여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에 취떡과 제물을 차려 놓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이 군의 3대 특산물이 ‘무심이.’ 라는 이름의 배와 ’재래종 염소,‘ ’‘석청’이었다. 그 중 무심이라는 이름의 배는 길쭉하고 울퉁불퉁해서 생기기는 못 생겼지만 씨가 없을뿐더러 껍질이 얇고 물이 많으며 맛이 뛰어나 조선시대에 진상품으로 바쳐졌었다. 이 배나무는 신라 선덕여왕 때에 자장율사가 들여왔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인제 원님은 배 자랑하고, 횡성 원님은 앞뜰 자랑한다.”는 속담이 전해올 만큼 이름이 났었는데, 어느 새 사라져 버리고 현재의 인제 3대 특산물은 ‘곰취’ ‘고로쇠’ ‘황태’로 자리를 바꾸고 말았다.
인제군에서 배출한 시인 가운데 박인환(朴寅煥)이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박인환은 1926년에 인제읍 상동리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平壤醫專)을 중퇴하였다.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리》 《남풍(南風)》 《지하실(地下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다. 그는 1949년에 김경린(金璟麟) ·김수영(金洙暎)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끼었다. 그는 《목마(木馬)와 숙녀》등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다리를 지나 관도官道가 먼데 숲은 두어 채의 민가를 기다리고 있네. 땅이 서늘하니 항상 눈(雪)이 남아 있고, 산이 깊으니 아직 꽃이 없다. 가시 처마에 추운 참새들이 싸우고, 소나무에는 저녁바람이 많다. 나그네의 정상情狀은 시름과 병을 더하여, 턱을 고이고 앉았노라니 해가 이미 비꼈네.” 성현成俔의 시 한 자락이 쓰여 진 고을이 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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