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깊은 절 안동의 봉정사와 천하의 절경 회룡포를 가다.
9월 중순에 가면 가장 좋은 곳이 있습니다. 나라 안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안동의 봉정사와 천하의 절경이 있는 예천의 회룡포입니다.
문득 가고 싶고, 보고 싶고, 그곳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은 곳이 바로 봉정사와 회룡포입니다.
나라 안의 절집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 바로 봉정사 극락보전입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찾았던 유서 깊은 절이 봉정사입니다, 개목사에서 봉정사로 넘어가는 길이 얼마나 고적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촬영된 곳입니다.
다시 이어질 여정은 내성천이 휘감아 돌면서 만든 물돌이동으로 천하의 절경으로 알려진 회룡포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무르익어가는 노란 벼이삭들이 황금처럼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될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17세기 초에 안동의 지리지 「영가지」를 편찬한 권기는 안동의 지세를 “산은 태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로부터 흘러온 것을 알 수 있으며... 산천의 빼어남과 인물의 걸 특 함과 토산의 풍부함과 풍속의 아름다움과 기이한 발자취”가 이곳에 있다 하였다. 멀리로 태백, 소백의 백두대간이 지리산으로 흐르고 낙동강의 물줄기가 아슴프레하게 보이는 천등산은 안동의 서쪽에 있고 그 산에는 봉정사, 개목사 같은 고색창연한 옛 절이 있다.
천등산(575m)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소나무와 잡목들이 울창하고 산세가 온화하며, 수려하다. 주차장을 지나 산 길을 접어들면 숲길은 아늑하고 계곡 물소리가 제법 요란한 좌측에 정자가 한 채 있다. 퇴계 이황이 이 봉정사에 묵으면서 공부하다가 자주 나가 쉬었다는 정자의 옛 이름은 낙수대였다. 밋밋한 그 이름을 퇴계는 정자에서 듣는 물소리가 옥을 굴리는 듯 아름답다고 하여 명옥대로 바꾸었다. 바위 사이를 흐르는 시내물소리가 멎기도 전에 「천등산 봉정사」라고 쓰여 진 일주문에 들어서고 나무숲이 우거진 길을 계속 올라가면 봉정사가 나타난다.
빼어난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숨어있는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鳳停寺)는 의상이 세운 절로서 창건설화는 이렇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이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려 보냈는데 종이로 만든 봉황새가 앉은 이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고 이름 지었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의상이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이산에 오르니 선녀가 나타나 횃불을 밝혀 걸었고, 청마가 앞길을 인도하여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고 청마가 앉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봉정사라고 지었다 한다.
창건이후의 확실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참선도량으로 이름을 떨쳤을 때에는 부속암자가 9개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한국전쟁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리 등을 모두 불태워 역사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화마을과 이곳 봉정사를 찾았고 그때부터 이절은 입장료를 받게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나라 안에 가장 오래된 건물
이 절에는 고려 때 지은 극락전(국보15호)과 더불어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과 조선후기 건축물인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계보를 고스란히 간직해왔기 때문에 건축박물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나무숲 길을 걸어가면 돌계단에 이른다. 한 발 두 발 숨이 가쁘게 올라가
면 봉정사의 강당인 덕회루 밑으로 지나게 된다. 마치 부석사의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 석등 앞으로 올라가듯이 그 문을 들어서면 석축이 나타나고 대웅전을 중앙에 두고 요사채와 화엄강당이 눈 안에 들어온다. 그 좌측으로 같은 위치, 같은 높이에 극락전이 고금당과 함께 있다.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정한 맞배지붕으로 나라 안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해제 보수하는 과정에서 였다.
중도리에 흠을 파고 기문장처(기록이 들어있는 곳)이라고 표시한 곳을 열어보자 극락전의 상량문이 들어있었고 그 상량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동 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산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년)에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이 상량문이 밝혀짐으로서 그때까지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알려졌던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건했는데 봉정사의 극락전은 그보다 13년이나 앞선 1363년에 중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년이라는 년대의 차이보다 봉정사 극락전은 대체로 고구려식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락전은 1972년의 해체와 복원공사 때에 금, 은, 구리의 옛날식 삼색 단청이 지워져 버렸고, 그 중요한 일부분이었던 귀중한 벽화가 뜯겨 포장된 채로 내버려져 옛 맛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배흘림기둥에 기둥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식 맞배지붕이며 법당으로서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어진 필요한 구조만 있지 장식이 거의 없는 고려중기의 단아한 건물이며, 바닥에는 검은 전 돌을 깔았다. 이런 방식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보수 할 때에 대웅전․화엄강당․고금당이 새집같이 지어져서 몇백년을 세월 속에 묵어온 온갖 풍상이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대웅전에서 전면에 보이는 누각이 덕회루의 누마루다. 법고와 목어 사이로 봉정사의 오랜 역사를 적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나는 스님들이 머무는 무량해회(無量海會)라는 요사채를 돌아 영산암으로 향한다. 원래에는 천등산에서 흐르는 골짜기 그대로가 길이던 것이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촬영되고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골짜기를 메우고 계단을 만들었다.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89년에 네 개의 해외영화제 그랑프리를 비롯 특별상을 받아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서 늙고 어린 승려 3명의 구도적 삶을 담고 있다. 투철한 수행으로 득도의 경지에 오른 노선사 해곡이 “사방이 몹시도 어두우니 마음의 심지에 불을 밝히고 갈 길을 비추어라”고 어둠 속에서 석등의 심지를 돋우던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면이다.
지조암과 더불어 봉정사에 딸린 암자중의 하나인 영산암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지인의 집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다가 옮겨진 우화루의 작은 문을 지나 영산암의 마당에 들어서면 큰 바위 곁에 잘 드리워진 소나무가 한그루 있고 목백일홍 나무와 여러 가지의 나무들이 요사채, 삼성각, 응진전 등 다섯 채의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지난날 봉정사의 스님들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절 영산암에는 상주하는 스님이 없다. 나는 하얀 고무신 두 켤레가 놓인 요사채 마루에 기대 앉아 세상에 찌든 내 마음을 풀어 놓는다. 풀어진 내 마음은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그 가벼움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신정일의 암자기행> 중
낙동강의 큰 흐름과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의성포가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커브를 돌면서 거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도리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정여립이 의문사한 전북 진안의 죽도와 무주의 앞섬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천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예천군 용궁면의 의성포 물도리동이다. 장안사 뒷길로 300미터쯤 오르면 전망대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의성포 물도리동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신비하기 짝이 없다.
의성포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섬처럼 되어서 조선조에 귀양지로 되었는데, 고종 때 의성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의성포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1975년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을 실은 배가 이곳에 왔으므로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에 고립된 섬처럼 그렇게 떠 있는 의성포의 물도리동은 ?정감록?의 비결서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손꼽혔고 비록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고려 때의 문인인 이규보는 그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고율시(古律詩)에 이곳 용궁현에 와서 원님이 베푸는 잔치가 끝난 뒤에 <십구일에 장안사에 묵으면서 짓다>라는 시 한편을 남겼다.
산에 이르니 진금(塵襟)을 씻을 수가 없구나.
하물며 고명한 중 지도림(진 나라 때의 고승으로 자는 도림)을 만났음에랴
긴 칼 차고 멀리 떠도니 외로운 나그네 생각이요
한 잔 술로 서로 웃으니 고인의 마음일세
맑게 갠 집 북쪽에는 시내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지는 성 서쪽에는 대나무에 안개가 깊구려
병으로 세월을 보내니 부질없이 잠만 즐기며
옛동산의 소나무와 국화를 꿈속에서 찾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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