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도보 답사 <관동대로>두 번째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2012년 5월 둘째 주인 11일부터 13일까지 정기기행으로 우리나라 옛길인 <관동대로> 두 번째 구간을 걷습니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서 동해시까지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관동대로중에서도 차마고도처럼 아름다운 갈령재에서 용화리까지 이어지는 길, 바닷길이 아름다운 초곡, 비운의 임금인 고려 공민왕릉과 삼척의 죽서루, 그리고 동해에 이르는 길이 두 번째 걸어갈 길입니다.
역사와 비경이 만나는 관동대로 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터골 마을에서 절터골교를 지나자 오래된 소나무 두 그루 밑에 당집이 있다. 밭을 매는 마을 사람에게 길곡으로 가는 길을 물었더니 “능선을 타고 가다 돼지 막사를 만나면 그곳에서 물어보고 내려가면 호산인기라”고 이야기 한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울진삼척지구 산불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탄 나무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길은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은 마치 구령령 옛길이나 대관령 옛길처럼 아름답다. 이리저리 이어지는 산길을, 한참을 오르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우르르 따라 짖는 소리, “개 한 마리가 헛 짖으면, 뭇 개는 따라 짖는다.”는 옛말이 맞다. 결사적으로 우리를 향해 짖는 개들, 완전히 개판이다. 하지만 개만 있고 사람은 없다. 그곳에서 산길은 휘돌아가며 마치 ‘차마고도’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나타난다.
나는 일행들을 뒤따라가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 능선에 오르자 길은 두 갈래 길이다. 인적이 끊어진 길에서 길을 잃으면 길을 물어볼 사람이 없는 것이 언제나 문제다. 지금도 그렇다. 길은 확실하지 않고 표지판도 없으니, 믿을 것은 지도뿐인데, 지도를 보면 아무래도 바다 쪽보다 산 쪽으로 이어진 길이 맞을 듯 싶어 위쪽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바다와 산이 만나는 곳, 멀리 바라다보면 수평선 너머 보이는 바다와 하늘에 잇닿은 듯한 산 능선 그런데 길은 자꾸만 바다 쪽에서 멀어져 간다. (...)
소공대비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황희黃熹에 얽힌 비석이다.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에 관동지방關東地方에 큰 기근이 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었다. 그 때 이명덕李明德이라는 관찰사가 백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자 황희가 대신 가서, 백성들을 잘 구호하고, 이 고개 바위 위에서 쉬었다가 갔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던 황희의 현손인 맹헌孟獻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이곳에 와서 소공대의 사실을 적은 비를 세웠다. 그 비가 현재 <강원도 문화재 제 10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손꼽히는 청백리인 황희에 대한 글이 <해동잡록>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방촌은 타고난 모습이 웅위雄僞하며 침중하고 도량이 있었다. 30년을 정승으로 있으면서 기쁨과 노여운 기색을 표정에 나타내지 않았다. 종들을 대우하는데 매질을 하지 않아도 일하기를 즐겨하였다. 한 번은 보좌관들과 무슨 일을 의논하고 막 붓을 적시어 문서를 쓰려는데 어린 종이 그 위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아이들이 좌우에 몰려들어 울고, 불고 장난치고 깔깔대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으며, 혹은 그의 턱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救恤해 주어, 안주安住할 곳이 있게 해주고야 말았다. 대사헌이 도어서도 대체大體를 세워 나가기에 힘쓰고 하나, 하나 까다롭게 굴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고 진숙되었다.“
요즘에 모 재벌그룹의 회장이 자기 아들이 맞았다고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순수 가서 복수를 하기도 하고, 조금만 권세가 높다 치면 별스런 완장이나 찬 듯이 난리법석을 떠는 풍토에서, 황희 정승 같은 사람이 몹시도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소공령을 지나가는 차마고도
비를 세운 그 뒤부터 임원항 서쪽에 있는 이 고개를 소공령召公嶺고개라고 불렀다. 평해로 유배를 가던 이산해가 지은 시에는 “높고 높은 소공대에서는 멀리 울릉도가 역력히 보였고,” 라는 구절이 있는데, 오늘은 날이 맑은데도 울릉도가 보이지 않는다. 소공대비 앞에 배낭을 벗어놓고 앉아서 바라보자 점심을 먹은 임원항이 한눈에 내려 다 보인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고 임원항으로 들어오는 한 척의 배를 바라다보인다.(...)
그래, 이렇게 높게, 혹은 멀리서 바라보면 세상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개미집처럼 자그마한 집들, 그보다 조금 큰 건물, 성냥갑만도 못할 것 같은 자동차,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사는 것 같은 무수한 사람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으면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 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 2부 ‘독서와 저술‘에서 산에 올라 느낀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대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높은 곳에 있으므로 아래를 굽어본다. 그대들 가운데 웃으며 높이 오를 자가 누구인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른 자는 온갖 비극과 비참한 현실을 비웃는다.“
(...)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길, 이 길을 한번이라도 걸어본 사람들은 이 길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하늘과 산과 바다가 맞닿은 길, 그래서 내가 즉석에서 한국의 ‘차마고도’라고 명명지은 길, 이 길을 걸어서 삼척으로 평해로 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올올이 남아 바람결에 들려주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헤집고 돌아다니다 보면 나라 어디 건 아름답지 않은 곳 없고 살만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 길을 한참을 내려가자 기적처럼 길곡마을이 나타났고 그 마을에서 장재용옹(70세)에게 지난 옛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옛날이지요,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말 타고 고개를 넘어 가는 것을 보았어요, 호산장터에서 장을 본 장사꾼들이 7, 8명씩 떼를 지어 저 길을 오고갔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돈 모아가지고 소공대 맞은 편 제사 지내는 데에 가서 장사 잘 되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냈어요,” 내가 언제까지 사람들이 많이 다녔느냐고 묻자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까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어요” (...)
어디 가서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비가 내려서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오직 우리만이 가을의 절정을 만끽하고 있는 죽서루를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표현햇다.
‘삼척 죽서루(竹西樓)는 오십천(五十川)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경치가 비할 데 없이 훌륭하다. 절벽 아래에는 안 보이는 구멍이 있어, 냇물이 그 위에 이르면 새서 낙수 물처럼 새고, 나머지 물은 누각 앞 석벽을 지나 고을 앞으로 흐른다. 옛날 뱃놀이하던 사람들이 잘못하여 구멍 속에 들어갔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한다. 사람들은 ‘고을 터가 공망혈(空亡穴:묘 자리나 집터를 잡을 때 피하는 곳 중의 하나)에 위치하였으므로 인재가 나지 않는다 한다.’
죽서루는 삼척시 성내동 오십 천변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져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제일 큰 누정이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유일하게 바닷가에 세워지지 않고 내륙 깊숙이 들어 앉아있는 죽서루는 오십천의 풍광이 바닷가 경치에 못지않게 빼어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인접한 천은사에서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가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그가 두타산에서 숨어 지낼 때 죽서루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태종 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 동쪽에 있던 죽장사는 조선 태종 3년인 1403년에 지어져 현종 3년인 1662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죽서루(서쪽에 지은 누대)라는 이름도 이 절 서쪽에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하고, 또는 옛날 기생 죽죽선竹竹仙이 놀던 곳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삼장사라는 절은 옛날 죽장사竹藏寺가 있던 자리에 1925년에 이우영李愚榮이라는 사람이 새로 지은 절이다.
삼척 죽서루에 걸려있는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대액과 죽서루는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가 썼고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3년에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의 글씨이며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와 율곡 이이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 누각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로서 겹치마에 팔작지붕이며 일층에는 길이가 모두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웠으며. 그 중 8개는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그 나머지 9개는 자연석위에 세웠다. 본래는 정면 5칸에 측면 2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죽서루는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십천변 맞은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일품이고 특히 가을 단풍에 보이는 죽서루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죽서루의 풍광을 박종은 『동경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삼척의 서천 천리 절벽이 맑은 강을 위압하듯 다가섰는데, 그 뒤에 자리 잡은 누각이 죽서루이다. 죽서루에 올라가 난간에 의지하면 사람은 공중에 떠있고 강물은 아래에 있어 파란 물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거꾸로 잠긴다. 물 속 고기떼는 백으로 천으로 무리무리 오르락내리락 돌아가고 돌아오는 발랄한 재롱을 부린다. 가까이는 듬성듬성 마을집이 있어 나지막하게 떠 있는 연기가 처마 밖에 감돌며 멀리는 뭇 산이 오라는 듯 가뭇가뭇 어렴풋이 보이니 누대의 풍경이 실로 관동의 으뜸이다.’(...)
묵호항이 북평과 합해져 동해시가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소설가 심상대가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을 통해 묵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묵호의 묵호항은 지금 비에 젖어 있다.
“내게 있어서 동해바다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 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밖에서 이랑지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의 근기를 느껴 매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 그렇다. 묵호는 술과 바람의 도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독한 술로 몸을 적시고, 방파제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부두의 적탄장에서 날아오르는 탄분처럼 휘날려, 어떤 이는 바다로, 어떤 이는 멀고 낮선 고장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울렁울렁하고 니글니글한 지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멀리 무덤 속으로 떠나갔다. 가끔은 돌아온, 이도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고 서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무언가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면, 그들은 이 도시를 기억해냈다.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이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니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가슴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하며 울다가 보면, 바다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어서 떠나가라, 어서 떠나가라. 얘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어서 인간의 바다로 떠나거라, 인간의 바다에 멀기가 있다.”
바다와 항구의 쓸쓸한 이미지가 절묘하게 들어 있는 소설의 일부분이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지만 그 고향이 가끔씩 차고 넘칠 때가 있다. 그때 고향은 멀게만 느껴지고 그리고 어느 날 그 고향을 낮선 이방인처럼 찾게 될 때가 있다. 나의 고향이 그럴진대 누구에게든 고향은 그런 애증의 장소가 아닐까?
“애정이라는 건 때에 따라 맹목적이고 본능적이어야 해, 그게 더 숭고한 때도 있단 말이야,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어, 어렵든 쉽든 모든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으니까, 답, 답을 찾아,“
‘답, 그 답이라는 것이 진정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 발한동은 바란이라고 불렸는데, 바란이 남쪽 묵호항구에 있는 마을이 향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향로봉香爐峯이다.
온 산천이 녹색의 물결을 이룰 오월의 둘째 주의 관동대로를 걸으며 나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0) | 2012.05.28 |
---|---|
임진년 석탄일에 통도사에서 운문사로 이르는 길을 걷는다, (0) | 2012.05.02 |
죽령 옛길과 병산서원, 그리고 낙동강 길을 걷는다. (0) | 2012.04.22 |
합천 해인사 천년길과 청량사 길을 걷는다. (0) | 2012.04.22 |
최시형 선생의 묘소. 최시형이 숨어 지낸 이천시 앵산 (0) | 2012.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