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건 그 자신에게만 아주 특별한
그런 장소가 있다. 그 곳에 가면 스쳐 지나간 모든 추억들이
한 올 한 올 살아나는 장소, 내게는 진안 마이산이 그런 곳이다.
마이산 그 중에서도 암마이산 정상에 올라
호남정맥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 것을 바라 볼 때
내 생애의 어린 시절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 찬란했던
슬픔과 기쁨의 음영이 마치 해가 뜨기 전이나 지기 전의 눈부신 노을처럼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내 나이 열일곱 무렵 마이산의 한 민박집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올라서 보았던 그 풍경,
알랭이 말한 ”시란 어린마음에 비친 영상이다.“ 그 말이
어쩌면 그리 딱 들어맞는 말이었는지,
그 추억을 안고 여러 차례 올랐던 그 바위산을 오르던 기억이 이 새벽에
다시 내 마음속으로 달려오는 것은 그 무슨 연유인가?
“추억이 잃어버린 낙원의 열쇠를
돌려줄 수 있으려면
흘러간 아름다운 청춘의
재를 뒤지는 수밖에 없구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실린 구절과 같이
나는 이 새벽 그 옛날 꿈속처럼 지나간 그 시절 속의 나그네가 된다.
그 때 그 장소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말 그대로 전율이었고
오싹한 한기였다.
“황홀경의 오싹한 전율이 우리의 등을 훑고 지나갔고,
우리는 영원히 헤어졌다.”
“전율이란 인간이 지닌 가장 훌륭한 면이니라.
세상이 인간에게 그런 감정을 쉽게 주진 않을지라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서야 비상한 일을 깊이 느끼게 되느니라.“
그 날 그곳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한 구절과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한 그 전율을 이해했다고 할까.
“이것이 아니라면 다 필요 없다.“ 그런 황홀경의 순간이 있다면
그 때가 그런 순간이었으리라.
가까워지면서 멀어져 가는 조선의 산들,
그 산들 아래 골짜기들이 있고, 그 골짜기마다 촘촘히 들어선 마을,
그 마을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
어쩌면 질식해서 숨이 넘어 갈 것 같은 그 삶을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슬픔이 되고 기쁨이 되어 마치 해일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그 장소에 다시 간다는 사실, 그 장소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리 설레면서 초조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규명할 수 없는 협곡에서처럼, 삶 자체의 샘 속에서처럼,
그 시인은 항상 자기의 최초의 어린이 및
소년 시절의 장소들로 돌아간다.(....)
거듭해서 그는 자기 삶의 시초 주위를 맴돌면서,
그 이후의 모든 것들을 그 위에 포개놓는다.
루네 문자를 더 날카롭게 조각하고, 더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는 동일한 길을 거듭해서 걸어가는 데에 만족할 수 없고,
또 거듭해서 다른 눈으로 동일한 이전의 수수께끼,
동일한 지나간 행복 주변을 맴도는 데도 만족할 수 없다.”
평론가인 후고 발이 헤르만 헤세를 묘사한 글이다.
나의 마음 역시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고향에서 맴도는 헤세의
마음 같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상에서 대지의 품에 안겨
조용히 쉬는 것보다 더 순수한 욕망을 알지 못하리.“
이런 마음으로 잠시라도 머물다 돌아올 그 산 봉우리가
지금 저렇게 선연하게 내 기억 속으로 살아오고 있는 이 새벽,
병신년 오월 스무닷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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