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2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닌데,

산중산담 2016. 7. 18. 15:17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닌데,

 

 

얼마 전 내가 속한 자치단체의 회의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얼마나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나왔는데,

대체적으로 지금보다는 더 오래 살 것이라는 이야기 끝에

건강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산다는 전제하에

누가 제일 오래 살 것인가,

다들 아무 말도 않고 있는 를 지목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수가 있어도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순서가 없는데,

그렇게 말들을 하는 것을 보고 옛 고사를 떠올렸습니다.

 

양주가 말했다.

기껏 살아보았자 백 살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며,

실제로 백 살을 사는 사람이란 천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설사 백까지 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갓난애의 시기와 늙어서 정신이 혼미한 시기가 거의 생애의 반을 차지한다.

이리하여 나머지 50년을 놓고 본대도,

밤에 잠자는 시간과 낮에 깨어 있으면서도 멍청하니 있는 시간이

거의 반이나 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머지 25년도 병과 슬픔, 걱정과 근심,

두려움 따위가 그 반을 차지한다.

이렇게 따지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것도 유유자적하여 아무 근심도 없는 것은,

한 시각도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산다 하지만, 결국 무엇을 하는 것이며,

무엇을 즐긴다는 것일까? 기껏 호의好衣, 호식好食, 음악.

미인美人과 즐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 호의. 호식도 언제나 충족된다고는 할 수 없고,

음악과 미인에 있어서도 사정은 같다. 거기에다가

형벌과 상이 우리를 구속하고, 명예와 법에 얽매이게 된다.

그리하여 허겁지겁 한 때의 헛된 명예를 다투기도 하고,

사후死後의 영광을 도모하기도 한다,

겁을 먹어 이목耳目의 욕구를 삼가고,

자신의 시비의 판단까지도 제대로 내리지 못해서,

인생의 주어진 즐거움조차 잃어버려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렇다면 쇠고랑을 찬 죄인과 무엇이 다르랴.

태고太古 사람들은 생이란 이 세상에 잠깐 와서 머무는 일이요,

죽음이란 저 세상에 잠깐 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음에 따라 행동하여 자연의 도리를 어기지 않았다.“

<열자> ‘양주편에 실린 글입니다.

 

잠시 살다가 이윽고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이 그것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들은 이런 저런 일로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난리가 아닙니다.

 

생이란 한조각의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그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기화스님의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에 실린 글입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구름 같은 인생,

그래서 열자의 이야기가 더 가슴에 다가옵니다.

 

길을 가다가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해골을 본 열자가 제자들에게 말한다,

“”오직 저 죽은 자와 나만이 알 것이다. 참으로 그대들,

일찍이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는 것이다.

죽은 자는 불행한가? 살아 있는 우리가 과연 행복한가?“

 

오래 사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이 지상에 어떤 것을 남기고 갈 것인가?

누구나 자신만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색무취를 좋아해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향기로운 자취를 남기고자 노력하고

어떤 사람은 본의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악취를 남기고 떠나갑니다.

어떻게 살다가 갈 것인가? 간단합니다. 겸손하게, 아니, 부끄럽지 않게,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살다가 가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이 무척 어려운 일일지라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

이 아침에 내가 나에게 다짐하는 말입니다.

 

병신년 오월 삼십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