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2

시간을 잃어버리는 날도 있다.

산중산담 2016. 7. 19. 08:37

 

시간을 잃어버리는 날도 있다.

 

 

지난 번 금강 답사 첫 날

신기한 일, 아니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씩이나,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알 수 없다. 두어 시간 전까지 실재했던 시간이

바람처럼, 아니 날아간 새처럼 발자국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 날 오전 뙤약볕에 걸어도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에,

영국사를 가면서 아량을 마음껏 부렸다.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니, 1247,

247분까지 영국사 은행나무 밑이나 원각국사 승탑 부근에서

잠도 자고 어정거리다가 해찰하다가 오리라 마음먹고

여느 날과는 달리 통도 크게 쉬는 시간을 두 시간을 주었다.

 

며칠 새 많이 내린 비 때문에 계곡물이 낭랑하게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삼단폭포를 지나고 천태산 자락에 자리 잡은 영국사의

천년 묵은 은행나무와 대웅전 앞 삼층석탑을 거쳐

원각국사 비문과 승탑 아래서 봄날의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영국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망탑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면서

1997년 겨울, 이곳을 찾았던 시절을 떠올렸고 그때 나는 이런 글을 남겼었다.

 

망탑봉(望塔奉)으로 난 산길에도 누군가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있다. 몇 시간을 두고 산을 헤집고 다닌 탓인지 한걸음 한걸음이 힘에 겹고 길은 제법 가파르다. 잔솔 우거진 산길을 10여분 올라가니 망탑봉이다. 자연석 화강암 지반을 그대로 살리면서 윗부분을 평평하게 다듬었고, 그 가운데에 네모진 둔덕을 만들어 기단을 만들었다는데, 탑 아래의 암반이 길게 파여 있다. 파인 골 위쪽에 조그만 여근 모양이 있고 그 암반 아래에는 촛불을 켰던 것으로 보이는 자국이 남아있다. 망탑봉의 여근곡으로 이지역의 기자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탑이 언제부터 망탑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근 마을이나 절에서 모두 망탑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멀리서 탑을 바라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 듯하다. 몇 개의 바위가 연이어 있고, 정상 끄트머리에 커다란 자연석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은 망탑봉 삼층석탑(보물535)이 서 있다. 각 면에는 우주를, 중앙에는 탱주를 하나 두어 양쪽에 단상 하나씩을 음각하였다. 기단이나 탑신부의 양식과 수법이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 지는 이 탑 앞에 서서 나는 세상을 바라다본다.

이 망탑을 중심으로 세상의 온갖 산들이 물결치듯 퍼져나가고, 그 산들이 이 탑을 향하여 기립하고서 SOS하며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듯도 싶었다.

나는 외로운 등대처럼 홀로 서 있는 탑 앞에 서서 희끗희끗 쌓여있는 눈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그 흐르는 눈물자국은 강물이었고, 귀로에 다시 찾은 금강 가에는 조그마한 고깃배 한 척이 세월을 기다리며 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금방 걷어 올린 듯한 싱싱한 고기 그물이 지는 겨울 햇살 받으며 나부끼고 있었다. <신정일의 사찰 가는 길>

 

망탑봉아래 암반 위를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 탁족을 하고

내려갔더니 딴 길로 내려간 손완주. 김려경총무를 비롯한 일행들이

수박을 썰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박을 먹고 시간을 보니

345분이었다. 아니, 우리가 영국사에서 보낸 시간이 세 시간이나 되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두 시간을 보내기로 했고,

그 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 한 시간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내가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있자, 늘 하늘(김영래)님이

오늘 주기로 한 한 시간의 잠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

점심 먹고 잠시 세상을 내려놓고 어정거리는 사이에

그 귀하고 귀한 한 시간이라는 시간과 한 시간 동안의 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잃었다고 여기는 시간이란 것은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만 있는 관념 같은 것일까?

 

기회는 끊임없이 변한다. 너무 일찍 도달한 이들은 너무 일찍 가버리며,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남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태양과 달이 정해진 길로 지나가는데,

시간은 사람들의 편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현자들은 크고 값비싼 보석 보다

작은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긴다. 찾기는 힘들고 잃기는 쉬운 것이 시간이다.”

<회남자>에 실린 글이다.

 

찾기는 힘들과 잃기는 쉬운 것이 시간만이 아니고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며 헤어지는 그 관계가 아닐까?

가능하다면 남은 생애에는 소중해서 보기도 아까운 그 시간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

지금의 내 마음이다.

 

2016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