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그림자들의 행진일 뿐
하루해가 저물어 갈 때
길게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던 적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저 그림자가 나인가? 내가 과연 저 그림자가 ‘나’의 것이란 말인가?
분명 나에게서부터 비롯된 그림자일 뿐인데,
그 그림자가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따라서 하는 다른 개체처럼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듯 따라다닐 때
문득 느끼는 공포감,
숙명처럼 내 주위를 맴돌면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는 그 ‘그림자’를 두고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쨌거나 인생이란 그림자들의 행진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그림자들을 그렇게나 열심히 부둥켜안고,
그림자들일 뿐인데, 그것들이 떠나는 것을 그렇게나
고뇌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들 곁을 거쳐 간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아니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 시절 내 곁은 스쳐간 그림자와 같다는 말이다. 어디 그림자 들 뿐일까?
내 마음 속을 스쳐 간 모든 것들도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무지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말은 더 가슴을 두드린다.
“모든 슬픔은 스무 가지의 그림자를 갖고 있지.
슬픔은 그 그림자들처럼 보이나, 그 자체가 그림자는 아니라오.
근심의 눈동자는 흥건한 눈물에 가려 전체를
여러 개의 사물로 쪼개어 놓기 때문이지.
마치 정면으로 보면 혼란하게만 보이고,
기울여서 보아야 뚜렷한 형태를 취하는 이상한 투시법의 그림처럼,”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1595에 실린 글이다.
길게 드리운 그 그림자가 내 그림자인가?
내가 과연 나인가? 자꾸 의심하다가도 내가 ‘나’라고 굳이 우기며
그렇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이 생,
그 그림자에게도 회한이 있고, 쓸쓸함이 있고,
그리고 무언인가를, 아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들이
가끔씩이라도 있을까?
가끔씩 나도 내가 아닌 그림자처럼 아니 유령이나 투명 인간처럼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힘보다는 경쾌함이며,
이념보다는 뉘앙스이며, 주조음主調音보다는 다양한 여러 가지 음조이며,
빛보다는 그림자입니다.
나는 현실 속에 있는 비속하고 평범한 것을 너무 두려워합니다.”
휠덜린의 글이 더욱 더 쓸쓸히 다가오는 이 아침이다.
나는 ‘오늘’이라는 말을 현실의 나로 살까?
아니면 길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나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볼까? 그게 가능할까?
2016년 8월 23일 화요일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에 의해 살고 있는 인간. (0) | 2016.11.30 |
---|---|
아픔은 진솔한 나를 만나는 넓게 펼쳐진 광장이다. (0) | 2016.11.30 |
떠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0) | 2016.11.30 |
내가 세상의 삶 속에서 잘 못하는 것들, (0) | 2016.11.30 |
길이 사라진 길을 걸었던 추억, (0) | 2016.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