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 살았고, 오래 살았으므로
세상의 이치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루 앞, 아니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고 사는 게 인생이다.
전날 할 종일 비가 오락가락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자 구름 속에 보이는 해,
오늘은 맑은 날이라서 푸른 강물을 보리라 했는데,
출발하려고 하자마자 한 방울 씩 내리는 비,
그래서 차에서 다시 우산을 챙겼다.
정선 망하에서 동강변에 자리 잡은 귤암리로 이어지는
양치재를 오르는 동안 비는 내리지 않고 날씨만 쾌청하다.
그래서 우산을 지팡이 대신 삼고 걸어가지만
언제나 스틱도 안 가지고 다니는 나에게 우산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나만 그럴까? 이은주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도반들이 걸어가면서
비가 올 줄 알고 가져온 우산이 오히려 짐이 된 것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들을 쏟아냈다.(정선 기행에서의 일이다.)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걱정을 하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비를 조금 맞아도 ‘한 번 비에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라는 속담처럼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행여 내리는 비를 맞으면 불편할까 싶어
자기 스스로 챙겼다가 스스로 부담스러워 하는 우산, 그 우산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있다면 그 우산이 주인을 잘 못 만난 것이리라.
매 순간 결단하고 매 순간 후회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매순간 결단을 하지 못하고 매 순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세상에서 일어날 것이 일어나는 것이요,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매 순간 이래저래 만족하지 못하고, 찜찜해 하고 후회하는 마음들이여,
“지난 일 돌이켜 생각함도 미혹된 일이요.
장래를 미리 점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
만사를 눈앞에 닥칠 때까지 내버려 둔 채
조촐하니 마음 밭이나 가꾸자.“
청허당 홍주세洪柱世의 <한가할 때 閑中>라는 시 한 편이
가슴을 ‘텅’ 하고 두드리며 지나간다.
오늘 나는 그렇다 치지만, 어떤 사람은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도착하자마자
이틀이나 사흘 뒤 돌아갈 시간부터 걱정한다.
또 어떤 사람은 두고 온 가족 생각과, 일 걱정에 답사마저 뒷전이다.
왔으면 돌아가는 것, 잘 놀다 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아주 간단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매 순간 허둥대며 다가올 내일만 걱정하다가 세월을 보내고
그 내일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미리 두려워한다.” 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에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실린 글이다.
그렇다. 누누이 들었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데도 가버린 과거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다
온 생애를 걸고 있으니,
“개미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날씨의 바뀜을
미리 알며 거기에 대처한다.
그러나 그는 햇볕 쨍쨍한 어느 날 먹이를 찾아나서는 길에
그 앞을 지나던 사람의 발밑에 깔린다.
그것이 그의 최후의 날이다.
걸어가는 사람의 궤도를 그의 지혜로써 미리 볼 수 있는가?
그가 그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조건들을 추적할 수 있겠는가?”
박동환이 지은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에 실린 글이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돌아보고 후회한들 무슨 수용이랴,
하물며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걱정한들 또 무슨 소용이랴.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래도 과거도 아닌 오직 현재, 곧 지금只今을 잘 사는 것,
너무 준비하지 말고, 오늘, 이 시간을 살 것,
내가 살아야 할 삶이다.
2016년 9월 6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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