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닷가길 지금의 해파랑 길을 걷다가 만난 나이 드신 분이
나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는데,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시느냐?”
“여차여차해서 부산에서 통일전망대 거쳐서 두만강까지 걸어갑니다.“
“그래요, 속았수다.?”
속다니, 내가 누구에게 속았단 말인가?
나는 한 참이 지나서야 그분이 나에게 한 말이
제주도 방언으로 ‘수고 한다’는 말이고,
그 말이 제주도에서 이곳으로 일하러 나왔다가 이곳 남자를 만나 정착한
제주 해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수고’가 ‘속았다’는 것으로 변하는 그 경이와 같이,
세치 혀에서 나오는 ‘말’과
생각 속에서 파생하는 ‘언의’의 유희遊戱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휘황찬란하다.
그 유희에 속아, 아니 그 말에 빠져들어 전 재산을 바치고,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그 한 예를 에라스무스는 그가 지은 <바보예찬>에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속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라고 주장할지 몰라요.
하지만 속지 않는 것이 실은 더 큰 불행이에요.
현실의 사물 속에 행복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에요.
행복이란 사물에 관해 인간이 갖는 의견에 따라 좌우되니까요.
인간 세상의 일 중에는 ‘애매한 것’과 ‘다양한 것’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가장 오만하지 않은’
나의 아카데미 파 철학자들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분명히 밝혀 낼 수 없어요.
혹시 누가 무엇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자기 행복을 희생한 결과일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인간의 정신은 질서보다는 거짓말에 더 혹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요.
의심스러우면 직접 실험해보세요. 교회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겁니다.
만약 설교하는 내용이 진지하다면 청중은 졸고,
하품하고, 지루해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고함지르는 사람이......
‘어머 실례했군요.! 설교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하여튼 그런 사람이 할머니들이 들려줄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다들 잠에서 깨어나 입을 딱 벌리고 경청하겠지요.“
<바보예찬 72>에 실린 글이다.
진지하고, 진실하고, 교훈적인 설교는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냥 웃어넘기는 말, 거기에다 살짝 음담패설을 교묘하게 뒤섞고,
그냥 시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나누는 말을 잘 하는 사람들의 설교를
사람들은 부담 없어 하고 좋아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기독교나 불교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좋은 책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라고 할 때
나쁜 책은 술술 넘어가지만 영혼에 걸리는 게 없어서
나중에 생각하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다.
그냥 읽기 좋은 책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말이나 강연은 메아리처럼
계속 여운이 남는 말과 강연일 것이다.
그런 강연, 그런 말을 들 때
솔로몬이 말한
‘주의 깊은 제자는 스승의 입술에 매달려 있습니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참다운 스승이나 종교 지도자,
좋은 정치인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중론이다.
사람은 많은데 마음을 기댈 사람이 없다.
마음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없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2016년 9월 12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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