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생각들이 연달아서 파생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 아닌 내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리라.
가고 싶어도 갈 곳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며,
출구도 없는데, 항상 어딘가로 도피처를 찾고 있는 사람들,
오늘의 이 시대만 그런 것일까?
어느 시대, 누구나 그러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미움 받으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듯이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의 위대한 기적입니다.
나는 느낍니다. 여기서는 모든 ‘삶’이 살고 있다고,
그러나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연주되지 아니한 선율이 하아프 속에 깃들어 있듯이
저녁 어스름 속에 숨어 있는 것들이겠습니까?
물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겠습니까?
신호를 주고받는 나뭇가지겠습니까?
향기를 띠는 꽃송이겠습니까?
늙어가는 긴 가로수 길이겠습니까?
오고가는 따뜻한 동물들이겠습니까?
갑자가 날아오르는 새들이겠습니까?
대체 누가 사는 것이겠습니까?
신神이여! 당신입니까?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전 과정을
‘기적‘ 같은 일이며, 그런 삶을 신에게 돌리면서도,
그가 한 편의 시에서 그토록 갈구한 것은
‘삶’에 대한 물음표이다.
루 살로메라는 아름다운 러시아 여자를 두고
삼각관계였던 니체는 그 삶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삶이란 자신의 재판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저마다의 재판관이 있지만 그 재판은
항상 완결이 아닌 미결일 뿐이다.
결국 잠시 살아야 하는 이 지상에서의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살아야 하고,
그 삶이 즐거운 것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도 당신도, 자기에게만 주어진 그 ‘삶’을 방기할 때가 있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네.”
“뭐라고요? 오늘을 살지 않았습니까?
삶은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눈부신 당신의 의무입니다.”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반문하고 단정 짓고 있는
그 삶을 절실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우리들의 생,
그 삶에 지쳐 있을 때 악마의 속삭임같이 들리는 소리,
“삶이여! 삶이여,! 살아 있다고 이름 하나, 사실은 죽었구나.”
중국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의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삶’은 일말의 희망 속에 계속되고 있는데,
2016년 9월 21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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