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일곱 번째로 걷는다.
2016년 한국의 강 기행 ‘금강 따라 천리 길“이 11월 넷째 주말 일곱 번째, 마지막 여정으로 펼쳐집니다.
전북 장수 뜸봉샘에서 시작된 여정이 강경을 거치고 익산의 웅포를 지나 군산 하구둑에서 마무리 됩니다.
마지막 여정에 동참하실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강경은 은진의 서쪽에 있다. 들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불근 솟아나서 동쪽을 향했고, 두 가닥 큰 냇물을 좌우로 마주하였다. 뒤로 큰 강이 조수와 통하나 물맛이 그리 짜지 않다. 마을에 우물이 없고 온 마을에 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고 강물을 길어 독에 부어 둔다. 며칠을 지나면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윗물은 맑고 서늘하여 비록 여러 날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아니한다. 오래될수록 더욱 차가워지며 수십 년 동안 장질(藏疾)을 앓던 자라도 1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를 뽑는다 한다. 어떤 사람은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토질(土疾)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상등(上等)이다. ……한다
“라고 했으며,
”여산 서북편에서 채운산(菜雲山)이 되었다. 하나의 외로운 들 가운데 우뚝 솟았고, 그 위에 양음영천(養蔭靈泉)이 있는데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잔치 놀이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채운산에서 하나의 작은 들을 건너면 황산촌(黃山村)이 있다. 돌산이 강에 다달아 절벽이 되었고, 은진(恩津) 강경촌(江景村)과는 작은 개[浦]를 사이에 두고 있, 배가 통하는 요지가 된다.
서쪽은 용안(龍安)․함열(咸悅)․임피(臨陂)이며, 아울러 진강(鎭江)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상권이 컸었던 강경은 금강하구에 발달한 하항도시로 내륙교통이 불편하였던 때에는 물자가 유통되는 요충지였다. 또한 이중환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사이에 위치하여서 금강남쪽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고 강경을 평하면서 “바닷가 사람과 산골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물건을 내어 교역 한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는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작은 배들이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벌여있다. 한 달에 여섯 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고 기록하였다. 가깝게는 금강 상류의 공주, 부여, 연기, 청양지방과 멀리는 청주, 전주지방까지 포함되는 넓은 배후지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편리한 수운에 힘입어 큰 교역의 장소로 발달하였던 강경포는 크고 작은 어선과 상선의 출입이 않았다고 한다.
그 때의 이름은 강경포였고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다. 그 무렵의 강경은 충청도는 물론이고 전라도, 경기도 일부까지 강경포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
성당면의 성당리에는 조선시대에 열아홉 고을의 조세를 받았던 조창인 덕성창이 있었고 부곡천이 금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는 성당포구가 있었다.
성당은 일명 승댕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조선시대 함열현감이 직접 조운선단을 이끌고 금강과 서해를 거쳐 한양으로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출발장소인 성당창이 있던 곳이다.
조선 후기에 이곳 성당창에 소속되었던 조군漕軍이 총 528명이었고, 이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 1만 6천석을 싣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도 “창 부근의 주민들은 성당창을 바라보며 산다.”라고 실려 있다.
조운漕運제도는 현물로 수취한 각 지방의 조세를 왕도까지 운반하는 제도이고 조창은 고려·조선 시대에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수로(水路)연변에 설치한 창고 및 이 일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세곡의 수납·보관·운송 기능을 담당했다.
조창은 해로나 수로 이용이 쉬운 서해와 남해, 한강 연안에 설치되었는데, 강변에는 수운창水運倉 해변에는 해상창(海上倉)을 설치하였다.
각 조창에는 판관(判官)이 배치되어 조운사무를 관장하고, 중앙에서 감창사(監倉使)를 파견하여 횡령 등 부정행위를 감독·조사하였다. 판관 아래에는 조세를 거두고 운송하여 경창에 입고시키는 일을 담당하는 색전(色典)이라는 향리가 있었다.
가을에 수집된 세곡은 이듬해 2월부터 한강과 서해를 통하여 개경으로 운송되었는데, 개경에 가까운 조창은 4월까지, 먼 조창은 5월까지 운송을 끝내도록 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덕흥창에는 200석 적재량의 평저선(平底船) 20척, 흥원창에는 21척, 나머지 조창에는 1,000석 적재량의 초마선(哨馬船)과 각선 6척씩을 배치하였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세미의 운반기간에 왜구가 발호하여 조운을 중단하는 사례가 있어 육로로 수송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조창제도를 정비해서 운용하였는데, 해상창은 예성강구(禮成江口)로부터 섬진강구(蟾津江口)에 이르는 서해안에 몇 군데 두었고, 남해안에는 영조 때에 설치하였다.
(...)
웅포는 일제시대에 1강경 2곰개(웅포)라고 불리며 금강 지역 유통 상권에서 두 번째로 큰 포구로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그 당시만 해도 웅포의 광덕정 아래에서 한산면 신성리로 왕래하는 나룻배가 있었으며, 이 나룻배에는 웅포 5일장을 찾는 충청도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김중규씨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성리 와의 나룻배의 운용은 양 지역의 경제 뿐만이 아니고 혈연적 관계로도 연결되었다. 당시 웅포와 신성리는 서로 결혼을 많이 하여 사돈마을이라고 부르곤 하였는데 중매는 대개 생선장수들이 섰다고 한다. 이곳 나루는 이용객이 많아 1905년 함열군 읍지에 의하면 군에서 이곳 나루터에 도장을 1명 배치하여 매달 20냥의 세전을 거두었다고 한다.
현재의 덕양정 자리는 본래 금강을 오가는 배들의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사가 있던 터이다. 용왕사의 용당이라는 명칭은 나루터나 포구의 제사를 지내던 곳을 말하는 것인데 웅포 용왕사의 용왕제는 고려시대 조정에서 관리하는 전국의 제사처였던 전국의 3산5악중 4해에 드는 서부릉변의 현장으로 당시 임피군에 속하여 국가적인 용왕제를 지내던 유서깊은 곳이다. 용왕사의 전통은 1970년대까지 지속된 웅포 용왕제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용왕제는 웅포면 웅포리 일대 9개 마을이 정월대보름날 덕양정 자리에 있던 용왕사에 모여 웅포에 소속된 어선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였다.
웅포에서 가장 유명한 특산품은 젓갈이었다. 현재는 젓갈하면 강경이지만 전에는 웅포의 젓갈이 더 유명했다고 한다. 웅포의 젓갈 중 조기젓은 특히 유명하여 이리, 전주 등으로 팔려나갔고, 이때 조기젓은 조기젓대로 젓국은 젓국대로 따로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포 등 인근 마을에서는 할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일 없으면 곰개(웅포)에 가서 젓국이라 날아라”고 핀잔을 주곤 한다.
(...)
금강의 발원지는 뜸봉샘이었고 본류는 발원지에서 이르는 하나의 물줄기 이름 하여 금강 즉 비단강이었으며 강의 길이는 401km였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금강의 길이 401KM를 하천연구가인 이형석 선생이 계측한 바로는 신무산 밥내샘에서부터 서천군 화양면 망월리 삼각점 기준으로 할 때는 397.25KM가 되고 서천군 장항읍 전망산 등대를 기준으로 볼 때는 407.5KM가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하구둑에서 옛 시절 하구로 보았던 구간은 현재는 금강이 아닌 서해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나의 물줄기에 곳곳에서 합류하는 모든 물줄기를 우리들은 지류라고 했을 때 금강의 지류는 큰 것만 열거해도 107개에 달했다. 공통의 하류를 갖는 모든 물줄기들을 밖에서 에워싸는 영역을 유역이라고 볼 때 금강의 유역은 경기도 안성에서부터 경상도 상주 또한 그리고 군산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면적(9886㎢)이 금강의 유역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금강은 하나의 나무이고 모든 강줄기는 하나의 구심점 즉 하구를 향해 달리지만 강줄기는 나무처럼 하나도 얽혀있지 않고 끊기는 법도 없다.
남도의 시인 송수권은 그러한 <한국의 강>을 이렇게 노래했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
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을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
지 깊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
늑대들처럼 몰려서서 짖는다. 어떤 창이 와도 이 옆구리
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동진 심곡 바다 부채 길과 강릉의 문화유산을 찾아가다. (0) | 2016.11.30 |
---|---|
한려수도의 절경 통영의 사량도의 칠현산과 지리산망을 가다. (0) | 2016.11.30 |
허균의 형 허봉의 자취가 서린 김화읍 생창역을 다녀오다. (0) | 2016.11.30 |
울릉도와 독도를 답사하고 돌아오다. (0) | 2016.11.30 |
늦은 가을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길, 하늘재와 문경새재를 걷는다, (0) | 2016.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