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한 삶이란 어떤 삶일까?
“당신의 삶은 행복한가?”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예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할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될까?
모르면 몰라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지금 없는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지금, 곧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無限’의 곳간처럼,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마음의 곳간을 채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돈에는 더 많은 돈 이외의 친구가 없기 때문인데,
이 세상에서 지상의 삶을 만족하면서 산다는 것,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살 수는 없다.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서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 수는 없다.
사려 깊고, 아름답고 정직하게 살기 위한 척도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없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심히 어려운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고요히 타오르는 촛불하나 켜고서 조용히 생각해보자.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왔으며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해답이 금세 내려진다.
어차피 한 세상 산다는 것,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비우고 살아가면 된다.
그런데 니체의 해답은 더 오묘하면서도 간단하다.
“지성이 성숙에 이르렀다는 것은, 인식의 가장 날카로운 가시나무
담장 아래에 진기한 꽃이 피어 있는 그런 곳을 가는 대신에,
‘이런 진기하고 특이한 것’을 위해서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서 뜰이나 숲이나 초원이나 밭에
만족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 ‘만족하다.’라는 글이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될 때
인간이 인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 비우고 산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괴테는 <차메 크세니엔>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도 즐겁지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도 그와 같다.
“행복은 자기만족 가운데 있다.“
라 브뤼에르의 말은 더 의미심장하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벽화가 그려진 화려한 침실이나 거실에서 살고,
한 사람의 공작을 가족으로 맞아들이고,
아들을 대 귀족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옳은 일이며,
전적으로 그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아마도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자, 답은 나왔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지만 반신半神이아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많지만, 황금시대는 멀다.
우리는 온유한 길과 비폭력의 마음을 구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의로움을 구하며 올바름을 구한다.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강조한 글과 같이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내려놓을 때에
마음과 몸이 날아가는 새의 깃털과 같이 가벼워질 것이다.
나도 그렇고, 그대도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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