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모악산 마실 길과 정읍, 모악산 소개

산중산담 2017. 4. 10. 13:56

 

모악산

옛 선인들은 산을 신령스런 존재로 여겼다. 옛 사람들은 산을 들어가는 것을 정복한다는 뜻의 등산登山이라고 하지 않고 잠시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으로 입산入山이라고 하였다. 산에 들어갈 때에도 산에 살고 있는 미물微物들이 행여 라도 놀랠세라 발걸음도 조심조심 들어갔고 대소변도 받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커녕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명아래 산이고 강이고, 인간 마음대로 개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는〈즐거운 지식〉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품고 있는 뻔뻔함을 사실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존재 자체를 자기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세계의 심판자 인간. 이런 태도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인간人間과 세계世界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들이 뻔뻔하다는 것조차 모르면서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9월 초였다. 김제와 완주 두 지역에서 모악산 자락에 <관광단지 조성>을 목표로 대대적인 개발을 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다.

김제시에서는 김제개발공사로 하여금, 모악산 자락 2만 여 평의 땅에 162억 원을 들여 <모악랜드>와 각종 위락시설을 97년까지 건립하는 사업이었다. 완주군은 모악산 관광단지 조성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32억을 들여 주차장 상가 및 기반시설을 한다는 것이었다.

모악산이 어느 산인가? 진표율사의 미륵사상이 움텄던 곳이고,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펼쳐졌던 곳이다. 어디 그 뿐인가?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 중의 한 곳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증산 강일순이 모악산 대원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의 구릿골에서 화엄적 후천개벽사상을 펼쳤던 곳이 아니던가?

나는 곧 바로 전북 환경운동연합의 주용기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다른 단체들과 함께 연합하여 모악산을 살리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방재정확보를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개발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이 염려될 것이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모악산은 도민의 휴식 처일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 역사성을 지닌 산이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최소한의 개발을 하라.”는 요지의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지방지는 물론이거니와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에 모악산을 살리자는 보도가 나갔다.

그날 나는 타 지역에서 온 답사팀의 안내를 맡아 답사를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날 아침부터 김지하 선생님에게서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화를 드렸더니, 모악산을 살리자는 보도가 나오기 전 날 밤 꿈속에서 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 시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아래의 시가 김지하 선생님이 새벽에 취한 듯한 몽롱함속에서 영감靈感으로 받은 강시의 전문이다.

 

“오늘 아침 강시降詩가 있었다.

객망오만리 客望五萬里

모악일초심 母岳一楚心

황토증산식 黃土甑山食

가멸칠산해 可滅七山海

 

이어 우리말로

“모악을 훼손하면

칠산 바다가 검게 물들 것,

이리裡里는 이것을 막고

계룡鷄龍은 뒤로 서라.“

 

나는 전주 모악산이

이 땅의 성산聖山 중의

하나임을 안다.

알면서 그 파괴를 묵과할 수 없다.

길은 모악으로 날 수 없다.

모악은 영태靈胎를 모셨다.

어머니 배를 가를 셈인가?

증산甑山 선생을 불망不忘하여

다만 삼가라.

 

<모악산 개발을 우려한다.>

이 시가 전북일보에 다시 보도 되었고, 그 힘을 받아 모악산을 사랑하는 운동이 전개 되어 결국 전주시장이 사표를 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김제시와 완주군의 개발바람에 몰려 파괴되어가던 <모악산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모악산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았다.

니체는〈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서 그러한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인간(Mensch)이라는 말은 측량자(Messende)를 뜻한다.......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척도(尺度)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그러나 그런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들다. 섬긴다는 말은 잘하면서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만 하지 않는가? 특히 일부 인간들의 품성이 그렇다.

서학西學(기독교)에 맞서 동학東學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의 뒤를 이어 2대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이 어느 날 청주의 신도 집에 갔을 때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누가 베를 짜고 있는가?“ 하고 묻자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짜고 있습니다.“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해월 선생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우리 며느리가 베를 짠다고 하지 말고 우리 한울님께서 베를 짠다고 하게“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베 짜는 그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며느리를 일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 한울님으로 알고 한울님 같이 섬기라’ 는 말이었다.

동학의 13자 주문이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다. 그 열 석자 주문 중 제일 처음 시작되는 글자가 모실 시侍자이다.

섬긴다. 사람을 섬기고, 모든 살아 있는 사물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일인가? 섬긴다는 말이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고,”

며느리가 한울님이라면 시어머니도 한울님이고 아들도 한울님이고 모든 사람이 다 한울님이고, 나도 한울님이다.

나무한 그루도 한울님이고 풀한 포기도 한울님이고 돌멩이 하나하나도 한울님이다. 모두가 공경하고 모두가 섬기는 세상에는 전쟁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사람을 섬기듯 자연에 대해 외경畏敬을 가지고 자연을 섬기면 자연도 역시 사람을 섬기지 않겠는가?

 

섬겨라. 그리하면 세상에 평화와 자유가 올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악산 살리기 운동을 펴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1995년의 일이니 오래전 일이다.‘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여러 가지 일,

그 중에 공익이 있고, 사익이 있다.

그런 면에서 김지하 선생님은 무학이나 사상으로서의 자취도 많아 남겼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사람이다.

내가 자주 말했다.

’정권‘은 오 년이지만

김지하시인의 문학과 사상은 이 나라 역사 속에 대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새삼 슬프고 슬프다.

 

 

 

모악산 마실 길과 정읍을 걸으며 역사의 흔적을 쫓는다.


2017121일 토요일 모악산 자락을 걷습니다. 귀신사에서 출발해서 세월의 뒤안길에 쇠락해 가는 백운동 마을과 용화교, 그리고 청도리 지나서 구릿골과 금평 저수지 일대를 걷고, 징업시 산외면 동곡리에 있는 김개남의 묘소와 김동수 가옥을 답사할 것입니다.

이번 도보답사는 요즘의 화두인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다 실패로 돌아간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고자 시시 됩니다.

우리나라 민중사상의 대표사상인 진표율사의 미륵사상, 정여립의 대동사상, 1894년의 동학사상, 그리고 증산 강일순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이 이 지역에서 태동하고 꽃피웠습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길을 걸으며 역사를 유추할 이번 답사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누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숨 가쁘게 헤쳐 가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불현듯 가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모악산 자락의 귀신사가 그런 곳이다. 전주에서 삼천이라고 부르는 세내 다리를 건너 용산리황소리독배를 지나 독배재를 넘으면 유각 마을이고, 그 아래를 좀 더 내려가면 청도리에 닿는다. 무성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길은 마치 어린 날에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몇 년 전만 해도 담쟁이 넝쿨이 수북히 덮은 나무 창틀 사이로 조선소 한 마리가 빼꼼이 얼굴을 내밀면서 낯선 손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해부터 소가 사라져 버린 외양간에는 허접 쓰레기만 그득하고 몇 걸음 옮기면 귀신사에 닿는다.

귀신사(歸信寺)는 신라 문무왕 16(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의상의 명으로 세워진 화엄십찰은 소백산의 부석사와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삭주의 화산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상대사 혼자의 힘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날 여덟 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금산사까지 말사로 거느렸다는,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사기에 따르면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으며 귀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절 이름을 발음이 귀신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나지금은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 뒤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과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 그리고 멀리 청도리 입구 논가운데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63)가 있을 뿐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이 귀신사를 지켜보았을 오래 묵은 느티나무 아래 돌계단에 앉아 언제나처럼 귀신사 일대를 내려다 보았다. 몇 그루 자라난 차나무의 잎들은 아직도 짙푸르고 대적광전 지붕 너머로 백운동 마을은 평화롭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듯 지나가고 그 바람결에파우스트속에서 린쎄우스의 말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 이 절은 모두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제 멋대로 내 던져진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질서정연하다.

절 뒤편에 수북히 피어난 봉숭아꽃들도 꽃들이지만 요사채를 가린 대나무 울타리에 피어난 여러 색깔의 나팔꽃들, 그리고 대적광전 한 켠에 눈부시게 만개한 붉은 목백일홍 꽃들과 더불어 무수히 들어오는 이 꽃 저 꽃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러한 꽃들 속에 또 하나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이숨은꽃이다.

귀신사는 1992년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숨은 꽃의 무대로, 문학기행차 오는 사람들이나 나처럼 조용함과 그윽함에 빠진 사람들이 즐겨찾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절이지만, 한 번 찾은 이는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절이다. 절 입구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병갑과 쌍벽을 이루었던 균전어사 김창석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무엇보다 이 절에서 가장 사람들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것은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백운동마을 풍경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야생 차나무가 듬성듬성한 돌계단을 내려와 대적광전의 세월 얹어진 기둥에 기대어 생각의 나래를 펴다가 양귀자의 표현대로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는 귀신사를 지나 백운동 마을로 가는 길에 접어든다.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는 원래 전주군 우림면 지역다가 1935년에 김제군에 편입되었다. 청도마을에서 백운동 가는 고샅길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라도 평화롭다, 길 양옆에 가지를 늘어뜨린 감나무들마다 붉은 홍시를 매달고 있고, 대추며, 밤이며 지천으로 늘어선 길이 백운동 가는 길이다. “백운동, 청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높은 산속에 있음이라고 지명총람에 실려 있는 백운동 가는 길은 오를 수록 숨이 가쁘다. 한발 한 발 힘겹게 오른 만큼 가까워지는 마을, 어느 새 백운동 마을이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오직 정의> 출간 기념으로 정여립과 김개남의 자취를 따라가는 기행입니다.

경술국치 무렵에 모 방송국과 방송을 촬영했다. 친일파들의 행적과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송이었다.

고창. 부안 일대를 돌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 있는 김개남 장군의 묘에서 방송의 마무리를 지을 때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어째서 친일파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고, 동학군들의 후손들은 어렵게 살고 있지요?”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일파들의 후손은 대개 한 말에 세도가들의 집안이거나 잘 사는 부자들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의 세습으로 잘 배웠고, 그래서 일제 때에는 일제에 협력하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역적의 후손들은 삼족이 멸하는 관례에 의하여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의 후손들은 성까지 바꿔서 살아남았습니다. 일례로 김개남 장군은 도강김씨 족보에서도 지워졌고, 후손 들은 성을 박씨로 바꾼 채 살아남아 1955년에야 성을 되찾았으며 손화중 장군의 아들도 성을 이씨로 바꿔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가난하게 사회의 하층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한 자는 흥하고, 한 자는 망한다는 말이 전해오지만, ‘선한 자는 망하고, 악한 자는 흥한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는 말했다. “너무 센데요? 되도록이면 그대로 방송하겠습니다.”

예전이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는데, 방송을 보니 그대로 무삭제로 나왔다.

역사를 두고 정의와 불의의 싸움이라고도 평한다. 그러나 그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면 대부분 부패하여 독재자가 되면서 불의를 신봉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은 거의 대다수가 실패를 한 뒤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의 행적이나 글까지도 없애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질곡 많았던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역사 속에서 이 땅을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려다 비운의 죽음을 맞은 대동사상의 선구자인 정여립과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김개남의 자취가 서린 지역을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