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로>세 번째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까지,
관동대로 세 번째 여정이 묵호항에서 대관령 너머 횡계에 이르는 구간에서 실시됩니다. 천천히 걷는 관동대로길,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매월당 김시습, 이중환, 김삿갓 이었다면 그 길을 가마를 타고 넘었던 사람이 신사임당, 허난설헌입니다. 또한 그 길을 말을 타고 넘었던 이들이 송강 정철, 허균,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지나 서울로 또는 평해로 오고 갔습니다.
녹음 우거진 초여름 넘어가며 풍류를 즐기고 멋을 함께 할 사라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묵호항이 북평과 합해져 동해시가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소설가 심상대가 <묵호를 아는가>라는 소설을 통해 묵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묵호의 묵호항은 지금 비에 젖어 있다.
“내게 있어서 동해바다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 한 잔의 소주를 연상케 했다. 어느 때엔, 유리잔 밖에서 이랑지어 흘러내리는 소주 특유의 근기를 느껴 매스껍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것은 단숨에 들이켜고 싶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파르스름한 바다, 그 바다가 있는 곳, 묵호, 그렇다. 묵호는 술과 바람의 도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독한 술로 몸을 적시고, 방파제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부두의 적탄장에서 날아오르는 탄분처럼 휘날려, 어떤 이는 바다로, 어떤 이는 멀고 낮선 고장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울렁울렁하고 니글니글한 지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멀리 무덤 속으로 떠나갔다. 가끔은 돌아온, 이도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고 서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무언가 서러움에 복받쳐 오르면, 그들은 이 도시를 기억해냈다.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이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니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가슴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하며 울다가 보면, 바다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어서 떠나가라, 어서 떠나가라. 얘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어서 인간의 바다로 떠나거라, 인간의 바다에 멀기가 있다.”
바다와 항구의 쓸쓸한 이미지가 절묘하게 들어 있는 소설의 일부분이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언제나 고향이지만 그 고향이 가끔씩 차고 넘칠 때가 있다. 그때 고향은 멀게만 느껴지고 그리고 어느 날 그 고향을 낮선 이방인처럼 찾게 될 때가 있다. 나의 고향이 그럴진대 누구에게든 고향은 그런 애증의 장소가 아닐까?
“애정이라는 건 때에 따라 맹목적이고 본능적이어야 해, 그게 더 숭고한 때도 있단 말이야, 문제가 있으면 답이 있어, 어렵든 쉽든 모든 문제는 답을 가지고 있으니까, 답, 답을 찾아,“
‘답, 그 답이라는 것이 진정 이 지구상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 발한동은 바란이라고 불렸는데, 바란이 남쪽 묵호항구에 있는 마을이 향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해서 향로봉香爐峯이다. “<관동대로> 중에서
“율곡 이이(李珥)를 낳은 사임당은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아서 자주 친정나들이를 했는데, 그 때 지은 시중의 한편이 <어머니를 그리며>라는 시이다.
그리운 고향은 겹겹이 막히고
가고 싶은 마음 속을 헤매는구나.
고향 땅 한송정에는 외로운 달빛
고향 땅 경포대에는 한줄기 바람
모래 위 백구 모이고 흩어지고,
파도 위 고깃배들 오고 가누나
어느 적에 강릉 가는 길 밟아
색동옷 입고 춤추며 어머니 곁에서 바느질 할고,
신사임당은 시와 문장에 능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지금 전해오고 있는 것은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 <어머님 그리워>라는 시 두 편만이 남아 있고 율곡이 지은 <사임당 행장>에 적힌 시구의 일부분뿐이다. 글씨와 그림에 더 탁월함을 드러내서 후세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임당은 세종 때의 화가인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화풍(畵風)은 안견과 달리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고, 그림으로는 풀벌레, 산수(山水)·포도·화조. 어죽. 매화 . 난초 등을 그린 40여 폭이 남아 있다.“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걸렸던 대관령
대관령,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오면 이레가 걸렸던 길이 대관령이었다. 예전에 이곳으로 부임해 오던 벼슬아치들은 험준한 대관령을 넘으며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또 넘어와서는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강릉 땅 가는 길이 험하고 먼데서 오는 서러움이 복 받쳐 울었고 강릉 땅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인심과 빼어난 산수 때문에 즐거워서 웃었다는 이야기이다. “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달려오다가 대관령을 넘으면 강릉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관령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의 진산이다. 여진 지역인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굽이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치(府治)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강원도는 바닷가에 있는 9군이 단대령 동쪽에 있기 때문에 영동이라 한다. 단대령은 대관령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강원도를 또 관동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령大嶺 또는 대관산大關山이라고도 불리고 옛날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했기 때문에 ‘대관령’이라고 불렸다.
대관령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강원 관찰사로 부임했던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었다고 하며 그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으로 몇 달 동안에 걸쳐 이 고개를 열었다고 하는데, 대관령 아래에 강릉이 있다. 강릉 지역 사람들이 강릉 땅이 살기가 좋고, 대관령이 하도 험한 고개라서 “강릉에서 나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지 않고 죽으면 그 보다 더 복된 삶은 없다.”고 했던 대관령 너머에 동해 푸른 바다가 있다.
대관령은 해발고도가 832m이고, 고개의 총연장이 13km에 이르며,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영동을 잇는 영동고속도로의 마지막 고개이며, 지금은 영동고속도로가 터널로 통과하고 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오십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이 된다. 정상에는 그 옛 시절 대령원이라는 원이 있었고 횡계리에는 횡계역(橫係驛)이 있어 험준한 교통로를 유지하여 길손들의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고려 때의 문신인 김극기는 “높은 산이 푸른 바다 동쪽으로 솟았는데, 만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와 천 봉우리를 둘렀네.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첫 닭이 울 무렵 돋는구나.' 하였다. <관동대로> 중에서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 길
대관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 길이었다.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관령의 교통량이 급증 하였고 동해고속도로의 건설과 설악산 국립공원일대에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대관령 일대는 항상 밀리는 구간이 되고 말았고 결국 대관령에 터널이 생기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대관령의 녹음 무성한 숲길을 걷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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