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산중산담 2012. 5. 28. 19:43

교동도에서 보낸 하루

 

다시 교동도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두시에 일이나 네 시에 김포 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서 일곱 시에 일행들과 만나 안개 자욱한 길을 달려

강화 창후리 선착장에서

월선포로 들어가는 배를 탄 것이 아홉시 무렵,

교동도는 내가 떠났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나를 맞았습니다.

먼저 화개산에 올라 안개 속에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군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도착한

교동면 소재지인 대룡리의 골목길,

마치 영화 세트장을 닮은 1970년대의 풍경,

그 길을 걷다가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평 반 남짓한 공간의 중앙 시계점을 사십 여 년 간

거의 쉬지 않고 출근한 주인에게서는

5천 원짜리 목도장을 팠고,

연백에서 피난을 왔다가 정착한 교동 이발관에서는

만원짜리 머리를 깎았습니다.

교동 다방에서는 교동면의 아무개 사장님(?)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 받았고,

대풍식당에서는 여든 여덟 살의 노모에게서

가슴이 아릿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피난길에 먼저 교동도에 정착한 남편의 친구를 따라 피난길에 오르며

갓 난 딸을 데리고 오다가 보니 정작 시댁에 있던 네 살 백이 큰 아들을 데리고 오지 못해

 피눈물을 흘리고 살았다는 이야기,

‘어떤 땐 딸을 데리고 바다 건너 고향 땅을 바라보며

'이 아이가 죽는다고 해도 두 고 온 아이 그리움보다 더 할까?“ 라는 말을 듣고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식은 내리 사랑이라 잊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다 잊었다고,

남편더러 이곳을 뜨자고 해도 통일 되면 가야 한다고 우기고 살더니

2십 년 전에 세상을 떴다고, 빛바랜 사진첩을 보며

그 노모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김지하 시인의 <비녀 산>의 시 몇 줄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역사이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도 서로 감싸 안지 못하고 흘러가는 세월 앞에

가끔씩 망연자실 한 채,

지난날을 회고 할 뿐인 가녀린 존재,

과연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한 때는 번성했던 하나의 행정구역인 교동현이 지금은 강화에 딸린 교동면으로,

그래서 구읍리, 읍내리등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

고려의 희종임금, 안평대군, 연산군, 광해군, 그리고 대원군의 아들이 유배를 왔던 곳,

저물어 가는 시간에 교동도를 떠나올 때 들리던 잔잔하게 부서지던 파도소리는

숨죽여 우는 가냘픈 갈매기의 울음소리 같았습니다.

 

임진년 사월 스무닷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