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나라 안에 최고의 명당 세종대왕 태실과 민속마을 한개마을이 있는 성주를 가다.

산중산담 2017. 7. 24. 14:43

 

나라 안에 최고의 명당 세종대왕 태실과 민속마을 한개마을이 있는 성주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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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에 최고의 명당이라 일컬어지는 곳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한 곳이 성주의 서진산 자락에 있는 세종대왕의 태실이다. 세종대왕의 아들들인 수양금성안평 등 18명의 왕자들 태실과 함께 단종의 태실이 모셔져 있는 이곳은 한 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이곳에 태실을 조성한 후, 조선 역사상 가장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 삼촌인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형제와 형제가 싸웠던 슬픈 역사의 현장이 있고, 근처엔 아름다운 민속마을이자 영남지방 제일의 길지라고 알려진 성산이씨의 씨족마을인 한개마을이 있다. 사드 문제로 알려진 이곳 성주 답사를 통해 성주의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 외에 김천의 갈항사 터와 선산의 죽장사 터를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성산 이씨들의 씨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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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월항면의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집안이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으로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대산동大山洞은 본래 성주군 유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대포동과 명산동 등의 여러 곳을 병합하면서 대포와 명산의 이름을 따서 대산동이라고 지었다.

그중 한개(大浦)마을은 대산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기름진 땅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앞으로 이천이라는 큰 내가 흐르고 있어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의 입지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한개마을 앞에 서서 보면 높이가 331.7미터인 영취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영취산의 품안에 꼬옥 안긴 듯해서 한개마을이 더 없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마을 앞에 있던 한개나루는 이미 사라지고 없고, 야트막하게 흐르는 강물만이 이곳이 예전에 나루터였음을 말하고 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곳은 이천伊川과 백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성주내륙과 김천 칠곡 지방을 연결하는 경상도 지방 교통의 요지였다. 한개마을 앞을 흐르는 이천은 벽진면의 고당산과 염표봉산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흘러 벽진면과 성주읍을 지나 월항면 대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 백천을 합하는데 백천은 성주군 초전면 백마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용봉동을 지나 월항면의 남서쪽에서 이천과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성산 이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것이 조선 초기였다. 세종대왕 태실(왕과 왕비, 왕세자, 왕자. 왕송, 공주, 옹주 등의 태를 봉안하던 곳)이 서진산에 들어서면서 성주가 정 3품관인 목사가 머무르는 성주목이 되었고, 이 들어서면서 말과 역을 관리하는 중인들이 몰려들었다. 그 무렵 진주목사를 지내고 성주읍 내에 살고 있던 이우李友성주읍은 체통 있는 양반들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이곳 한개로 옮겨와 살게 된 것이다.

이우가 처음 자리 잡은 뒤부터 대를 이어 살아왔는데, 한개마을이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성산 이씨 21세 손인 월봉月峯 이정현에 의해서였다. 월봉은 퇴계 이황의 직계제자로 당시 많은 선비들을 가르친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612년에 문과 식년시에 합격하며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스물여섯 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정현의 외 아들인 이수성에게는 달천. 달우. 달한. 달운 등 네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들이 백파伯派. 중파仲派. 숙파叔派. 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이때부터 각파의 자손들이 몰려드어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한 개마을은 지금도 조선시대에 지어진 100여 채의 전통 고가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각 가옥들은 저마다의 영역을 지켜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집성촌으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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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에서 손꼽히는 살만한 곳

인걸은 지령地靈에 의해서 태어난다.’ 는 풍수지리설이 들어맞아서 그런지 영남지방에서 손꼽히는 가거처로 꼽히는 이곳에서 조선 시대에 여러 인물들이 나왔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을 지낸 돈재 이석문이 이곳 출신이다.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가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는 세손이던 정조를 업고서 왕 앞으로 달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충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곤장만 맞은 채 벼슬에서 쫓겨나 이곳에 낙향 하고 말았다. 그 뒤 사도세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내고 평생토록 절의를 지켰다. 그의 후대 인물로서 조선조 말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던 응와凝窩 이원조李原祚의 고향이 이곳이고 조선말의 유학자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진상은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웠고 사서삼경 및 모든 학문을 배운 뒤 17세에 숙부인 이원조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철저한 주리론자로서 주자와 이황의 학통에 연원을 두었으면서도 주자의 학설을 초년설과 만년설로 구별하여 초년설을 부정하고 만년설만 받아들였다. 또한 이황의 이와 기가 동시에 발 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 만이 발한다는 이발일도理發一途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이황의 마음은 이와 기의 합체라고 말한 이황의 심합이기설心合二氣說에 대해서도 마음은 곧 이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하여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당시 도산서원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화서華西 이항로. 노사蘆沙 기정진과 함께 근세 유학 3대가로 불리는 이진상의 문인들이 곽종석. 이승희. 김창숙으로 이어져 계몽운동과 민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이상진의 아들인 대계大溪 이승희는 나라가 망 한 뒤 소복을 입고서 얼굴을 씨지 않았고, 성묘 이오에는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개 마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조물과 민속자료 등이 많이 있다.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고, 이석문이 사립문을 내고 사도세자를 흠모했다는 북비고택과 월곡댁 고리댁 등의 조선집들이 아직 남아 있다.

이진상이 학문을 연구한 한주寒洲 종택의 사랑채에는 주리세가主理世家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한주종택의 동쪽에 세워진 한주정사에는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한주 이상진의 제자들이 변함없이 퇴계 이황의 맥을 잇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고 있다.

이 마을 남쪽에 있는 들은 예전에 금다리라는 다리가 있어서 금다리들이라고 부르고, 관동寬洞이라 부르는 어은골 마을 앞에 있는 들은 조선시대에 사창이 있어서 사챙이들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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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리 셋이 있는 삼봉

한개 서쪽에 있는 삼봉 마을은 뒷산의 봉우리가 셋이 나란히 있어서 삼봉三峯이라 부르고, 한개 북쪽에 있는 명산鳴山마을은 영취산에서 유래된 소리개가 이곳에 앉아서 울고 갔다고 해서 울뫼라고 불렀는데, 울뫼라는 이름이 나빠서 마을에 근심이 떠날 날이 없다고 하여 화산華山이라고 고쳤다.

명산 동북쪽에 있는 정자인 심원정心遠亭은 완당完堂 이석오李碩五가 지었다는 정자이고,

일명 영축산靈畜山이라고도 부르는영취산靈鷲山은 월항면 대산동과 선도면 문방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25m인데, 이 산 자락에 있는 감응사에 신라 애장왕의 아들이자 제 4대 임금인 헌덕왕憲德王에 얽힌 이야기가 서려 있다. 애장왕이 늦어서야 왕자를 보았으나 불행하게도 왕자는 앞을 잘 볼 수가 없었다. 하루는 임금의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독수리를 따라 본피현(지금의 성주)에 잇는 약수를 찾아 그 물로 눈을 씻게 하면 낫게 될 것이다.“ 고 하여 그 이튿날 군사에게 명하여 독수리를 따라가 약수를 길어오게 하였다. 그 약수로 눈을 씻은 왕자는 앞을 잘 보게 되었으므로 임금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약수가 있던 곳에 절을 짓고 감응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산은 신령스러운 독수리 산이라는 뜻으로 영취산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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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태실이 있는 서진산,

앞서 말한 것처럼 한개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월항면 인촌리의 서진산棲鎭山에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있다. 성주의 선주鎭山인 서진산은 월항면 인촌리와 칠곡군 약목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일명 선석산禪石山으로 불리고 있다. 대부분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서진산의 서남쪽 기슭에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시대의 고승 나옹대사가 세운 선석사가 있다. 이절은 태실이 들어선 뒤 태실을 관리하는 절이 되어 영조임금의 어필이 하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앞의 태봉은 풍수지리학상 최고의 명당 터로 알려져 조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들의 태와 단종의 태가 모셔져 있다.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 많아 사시사철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고 있다. 태봉은 서진산의 한쪽 자락이 빙 돌아 감싼 양지바른 봉우리인데 그 봉우리에 세종의 큰 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안평. 수양(진양). 금성.평원. 영흥. 임영의 대군들과 화의군, 계양군, 의장군, 한남군, 밀성군 수춘군, ,익현군, 영풍군, . . . 등의 왕자들과 문종의 아들이자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태가 모셔져 있다.

이 태봉에 처음 무덤을 쓴 사람은 성산 이씨의 시조인 이장경이었다. 그의 장례를 치르던 날 어느 노스님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저곳에 묘를 쓰게, 저곳이 더 없는 길吉地라네.” 하지만 저 곳에 누각樓閣을 지어서는 안 되네, 그것을 어기면 당신들의 소유가 안 될 것이네.“ 그 말을 들은 이장경의 후손들이 노승이 가리킨 나무들을 도끼로 베어 넘기자 큰 벌 한 마리가 노승이 사라진 쪽으로 날아갔고 절 아래에 도착해서 보니 벌써 떠난 줄 알았던 그 노스님이 그 벌에 쏘여 죽어 있었다. 후손들은 그 노스님의 말을 절반만 따라 묘를 쓰면서 세우지 말라던 묘각을 세웠다. 그 뒤부터 그 자리가 태를 묻을 자리라는 소문이 나 돌기 시작했고, 그 소문을 전해들은 왕실에서 사람을 내려 보내 그 자리를 확인했다.

하지만 왕실 지관이 처음에 본 바로는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묘각에 올라서 주위를 바라보는 사이 안개가 갇히며 봉우리가 환하게 들어 났다. 그곳이 바로 명당 중의 명당자리였다.

결국 그 자리에 왕가의 태실이 들어서게 되고, 이장경의 묘는 성주읍 대가면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편 그의 묘를 쓴 뒤에 그의 아들 다섯 형제가 다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묘를 쓴 뒤로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태실 가운데 가장 많은 태가 모여 있는 태봉은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봉우리 꼭대기에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해서 모두 19기의 태비胎碑를 앞세우고 두 줄로 길게 세워져 있다.

신정일의 <꿈속에서라도 꼭 한 번 살고 싶은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