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지리산과 섬진강을 지나 한려수도를 가다. 신년 기행

산중산담 2017. 11. 22. 14:19

 

지리산과 섬진강을 지나 한려수도를 가다. 신년 기행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있습니다. 한 해의 교차점에서 해넘이와 해맞이를 하며 새로운 꿈을 꾸기 위하여 겨울 학교를 떠납니다. 20171230()에서 20181월 일일(월요일)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에 지리산과 섬진강 부근에서 시작하여, 고성과 통영으로 이어지는 남해안을 답사하고. 벽방산 안정사를 답사고 통영에서 지는 해 떠오르는 해를 맞을 것입니다. 셋째 날 아침 이순신 장군이 크게 이긴 한산 섬을 답사할 것입니다. ‘한 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를 떠올리며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바다에 흠뻑 빠지는 시간을 마련합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에는

태안사로 오르는 산길은 올 적마다 호젓하다. 나무 숲 들이 우거진 계곡의 물길은 깊고, 세차게 흐르며, 산길을 돌아갈 때마다 피안으로 가는 다리들이 나타난다. 자유교, 정심교, 반야교를 지나 해탈교를 돌아서면 제법 구성진 폭포가 있고, 그 폭포를 아우르며, 백일홍꽃이 한 그루 만발해 있다. 지난해부터 보수공사를 위해 헐린 능파각 아래에는 이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나무 다리가 있었다. 양쪽 난간에 90쯤의 통나무를 걸치고 복판에는 나란히 널빤지를 올렸으며 노면 바닥에도 널빤지를 깔고서 능파각을 세웠었다. 그러나 나무가 세월 속에서 낡고 부실해지자 새로 세우느라 헐어버린 것이다. 능파각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길옆에 한국 전쟁 당시 이 부근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증명하듯 전투 경찰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고, 얼마쯤 돌아가면 태안사의 절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존희의 글씨로 동리산태안사(棟裏山泰安寺)라고 쓰여진 동판이 걸려있고, 일주문인 봉황문을 들어서면 부도 밭이다. 태안사를 중창해 크게 빛낸 광자 대사 윤다의 부도(보물 제274)와 부도비(보물 제275)를 비롯 다른 형태의 부도가 몇 개가 서있고, 부도밭 아래 근래에 들어 만든 큰 연못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탑을 세웠으며, 그 탑에는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안치 했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나무다리는 거의 썩어 있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아무래도 천년 고찰 태안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못이다.

광자대사 윤다는 8세에 출가, 15세 이 절에 들어 33세에 주지를 맡았다. 신라의 효공왕의 청을 거절한 윤다도 고려 왕건의 청을 받아들여, 이 후 고려 왕조의 지원을 받아 크게 부흥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적인선사 혜철의 비를 그대로 빼어 닮은 윤다의 부도비는 비신이 파괴된 채로 이수와 귀부 사이에 끼어있다.

지지지지

<!--[if !supportEmptyParas]--> <!--[endif]-->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 와룡산 향로봉 (香爐峯)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 운흥사(雲興寺)1,300여년 전 신라 문무왕 16(676)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운흥사를 찾아가는 길은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렌다.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이고 길가에는 흔한 가게는커녕 민가도 별로 없다. 산자락으로 난 길을 한참 가면 운흥사가 보이고 언제나 가도 한가한 풍경의 운흥사에 닿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운흥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본거지로 6,000여 명의 승병이 머물 만큼 규모가 컸던 절이다. 그 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수륙양면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운흥사는 숙종 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2월 초파일에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을 위해 왜적과 싸우다 숨져간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영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올해는 3월 초사흘에 지낸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 가장 많은 승군이 죽었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효종 2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그 뒤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다섯 간인 운흥사 대웅전은 영조 때에 지은 맞배지붕 집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 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흥사는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불가의 화원 양성소로 큰 역할을 했는데 조선시대의 불화 중 가장 많은 걸작품을 남기고 있는의겸(義謙)등이 이 절에서 불화를 그렸다.

그 당시 절의 규모는 현존하는 산내 암자인 천진암과 낙서암을 비롯하여 아홉군데의 암자가 있었고 곳곳에 남아있는 절터와 대형 멧돌 그리고 전방 1km 떨어진 언덕에 고승들의 사리가 안장되어 있는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한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진왜란때 병화로 절이 소실되었던 것을 효종 2(1651)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흥사를 답사하고 고성 상족암에서 공룡과 만나는 시간을 마련할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풍경화처럼 펼쳐진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태어난 인물로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김상옥(金相沃)김춘수(金春洙)유치환 등의 시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들 수 있다. 또한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일에서 숨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씨와 화가 김형근전혁림씨도 이곳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그들의 꿈을 키웠으며, 화가 이중섭(李仲燮)도 이곳에 있으면서 남망산 자락 아래 펼쳐진 통영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통영 바다 건너 쪽이 거제도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