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로>네 번째 하진부에서 모릿재 너머 여우고개까지,
울진군 평해읍에서 시작되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관동대로 네 번째 여정이 7월 13일(금)에서 15일까지 실시된니다. 대관령을 넘어온 여정은 평창의 하진부, 청심대, 대화를 지나 여우고개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대산에서 비롯된 오대천을 지나 모릿재를 넘으면 대화에 이르고, 그 길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생이 넘었던 길입니다.
예로부터 “오대산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하면 사흘을 앓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말은 옛날 강원도 강릉 사람들이 월정사에 가서 밥을 못 먹으면 한이 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들 역시 월정사를 지척에 두고도 오늘 갈 길이 멀기 때문에 갈 수가 없으니 마음속에 한으로 남아 있겠다.
진부면의 소재지인 하진부리는 오대천 가에 긴 벌판이 되었으므로 진벌, 아랫진부, 하진부라고 불렸는데, 조선시대에 보안도에 딸린 역으로 횡계와 대화로 통하던 진부역珍富驛이 있었던 곳이다. 진부역에도 수많은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기도 하고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던 곳인데, 강릉이 고향인 허균이 관리가 되어 진부를 지나며 하룻밤을 자던 중에 시 한편을 남겼다.
관리가 되고 보니 산부와 같아 / 공명이 더디다고 탓하지 않네. / 운소雲宵에서 내린 봉지封地 받으니 / 온 산해가 건유에 드는군 그래
한길엔 나는 꽃이 가득도 한데 / 산마루엔 어두운 안개 불어나누나 / 역驛 사람 거의가 구면들이라 / 찾아와 잔 권하며 위로를 하네.
허균도 나만큼이나 역마살이 심했던 사람인지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 역에 근무하는 역졸들이 구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청심대 서쪽에 있는 인락원
곡건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 자우실 마을이고, 인락원仁樂院은 청심대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인락원이 있었던 곳이며 그 동쪽에는 원에 딸린 밭이 있었다. 진부면 마평리 인락원 동쪽 자그마한 산에 청심바위라는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정자가 청심대이다. 큰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그 밑에는 맑은 오대천이 맑은 물이 휘돌아가는 그곳에 강릉기생 청심淸心이에 대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강릉부사를 지냈던 박대감朴大監을 사랑한 청심이는 박대감이 중앙 내직으로 영전하여 서울로 올라가자 대관령을 넘어 이곳까지 따라와서 작별을 고한 후 그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 절개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지역 사람들이 1928년 8월 이곳에 작은 정자를 짓고 그의 이름을 따서 청심대라고 명명한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한 점 꽃잎처럼 몸을 날렸을까?
문득 허균이 병오년 오월에 ‘이 여인에게 보냈던 편지 한통이 떠오른다.
연주延州의 나그네가 대정강大定江에 이르러, 배 위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며 말을 못하고 눈물이 옷 자위에 가득하므로, 나는 차마 보지 못하였네. 배가 떠나려 하자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우고 이별하는데, 이 무렵의 강산은 갑자기 무색해졌으니,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한숨을 쉬었을 것이네.“
얼마나 가슴 아린 이별인가? ‘배가 떠나는 그 순간에 강산이 무색해졌다‘ 고 표현할 만큼 이별의 아픔이 크다보니 그토록 절절한 이별의 글이 써졌을 것이다.
청나라에 갔던 담헌 홍대용 역시 아름다운 이별의 글 한편을 남겼는데, 그곳에서 사귄 벗 반정균에게 보낸 글이었다. “아아! 즐겁기는 새로 아는 사이가 되는 것보다 즐거운 것이 없고, 슬프기는 생이별보다 더 슬픈 것이 없다.“는 이 글에 반정균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사귐의 깊음과 이별의 괴로움이 기대의 간절함과 촉망의 지극함만 같지 못하다.“
이렇게 가슴 에이는 이별은 대개 강가에서나 정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경치가 좋은 곳에 만들어진 곳이 정자다. 정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불타오를 듯 붉게 물든 단풍이 나무와 강물과 치솟은 바위를 무색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지금 저렇듯 한번 타오르고 지는 단풍 뒤에 겨울이 다가오겠지,
답사를 다닐 때마다 만나게 되어 오르게 되면 마음속에 휴식과 풍류를 떠오르게 하는 누정은 무엇인가.?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게 일컫는 명칭으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 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이다. 이규보가 지은 <사륜정기四輪亭記>에는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고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 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조‘에 의하면 누정은 루. 정. 당. 대臺. 각閣 . 헌軒등을 통칭한다. 누각은 누관樓觀이라고도 하며 대개 높은 언덕이나 바위 혹은 흙으로 쌓아올린 대위에 세우므로 대각臺閣 또는 누대樓臺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3대 누각은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그리고 평양의 부벽루를 들 수가 있다. 그 외에 서울 경복궁에 있는 경회루慶會樓고 그 외에도안동의 영호루嶺湖樓, 남원의 광한루 삼척의 죽서루 평양의 부벽루등이 이름난 누각이다. 한편 강릉의 경포대, 평창의 청심대, 평양 모란봉의 을밀대등은 그곳의 대 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건립된 누정까지를 가리킨다. 누각과 달리 정자는 그 규모가 작은 건물을 말하는데 대처럼 건물에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경상도 함양지방을 비롯한 남부지방에서는 가운데쯤에 방 한간을 들여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어진 정자가 2003년 가을 불에 탄 함양의 농월정, 거연정, 담양의 환벽당 등이다. 이러한 정자는 대개 놀거나 풍류를 즐길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정각亭閣 또는 정사亭榭라고 부르며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세운다.
길이 끝나는 산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아침을 먹기 위해 한마음 식당에 들어가자 몸이 좀 불편하다는 주인아저씨 (정정수 66세)가 한마디 한다. “요즘 이 앞으로 난 길을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요, 며칠 전에도 아가씨 둘이 땅 끝에서 여기까지 23일이 걸렸다며 하루 저녁 자고 갔어요, 나이 먹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덜 쓰기 위해 노력하며 가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은 거 같아요? 어떤 때는 수십 명이 가기도 하는데 금년에도 여남은 팀이 지나갔어요,”그런데 선생님들은 어느 쪽으로 가세요?“ 하고 물어서 우리는 관동대로를 걷기 때문에 모릿재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자, ”그 사람들은 모릿재(옛 이름은 모로현이다)를 넘지 않고 대부분 장평 쪽으로 가지요,” 김자혁 씨가 혼자 걷는 사람도 있느냐니까 “혼자 걷는 사람도 많아요.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이 적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오는데 삼백만 원까지 썼다는 사람도 있고, 적게 쓴 사람은 80만원을 썼다는 사람도 있어요. 이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통일전망대까지 목표를 가지고 가지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그 길이 저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며, 우리의 땅이고 우리의 길이 아니겠는가.
벌써 7시 50분 좀 늦었다. 오늘은 조금 있다가 안명숙씨가 아침차로 오고, 저녁에는 박수자씨가 딸 태미진을 데리고 온단다. 장평 ic와 장성 진부로 길이 나뉜다. 산위로 구름이 피어오르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 문득 손이 시리다. 그래, 오늘 저녁에서 내일 모레까지 대관령 부근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었지, 신리교를 지나 신리 5리 고토곡마을을 지난다. 길이 끝나는 산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서 신선이 사는 곳 같다. 어쩌면 그 길을 지나게 될 우리들도 신선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이 곳 대화는 이웃한 봉평과, 제천 그리고 평창과 함께 이효석의 빼어난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중의 한 곳이다.
닷새마다 장이 서는 이 장 저장을 떠 돌아 다니던 장꾼들의 질펀한 삶이 펼쳐졌던 이곳의 풍경이 소설 속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름장이란 애시 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 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 거리에 긍싯 거리고 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기 마리나 사면 족할 이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고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을 낙구어 보았다.
“그만 걸을까” “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븟하게 사 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 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려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허생원과 조선달이 달 밝은 그날 밤을 새워 걸어 도착했던 대화장은 중대화에 있으며, 예전에는 하대화에 있다가 약 6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불과 4.5 십 년 전인 1960.70년 대만해도 5일장만 열리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나 먼데서 오는 장사꾼들이 모여 난장판이나 다름없었을 대화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한적하기만 하다. 1900년대 초 조선을 찾았던 W.E.그린피스는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의 시골 시장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조선 사람들의 최대의 즐거움은 장을 보러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조선에는 상점이 거의 없고, 매 5일 또는 6일 만에 장이 열리고, 그곳에서 자기가 만든 물건을 바꾸고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중략)장터에서는 물건을 팔고 사고, 행상을 하고 남의 얘기를 늘어놓는 일 외에 기분풀이로 술을 마시고 싸우는 일이 허다하다. 옷감을 사러 갔다가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농부도 흔하게 있지만, 그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원수와 주모가 만난 대화주막
이 곳 대화의 한 주막에 율곡 이이의 출생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다. 이이의 부친 이원수(李元秀)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수운판관이라는 벼슬살이를 하던 조선 중종(中宗 ; 1530년경) 때의 일이다.
사임당 신씨와 결혼 한 후 관직을 얻기 위해 처가인 강릉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을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신사임당은 과거 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 판관을 지내던 무렵 신사임당을 비롯 그의 식구들이 산수가 아름다운 이곳 봉평의 판관대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이원수가 가족들이 살고 있던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는데, 그 주막의 주모는 그 전날 밤 용龍이 가슴에 가득히 안겨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하늘이 점지해주는 뛰어난 인물을 낳을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는 것을 짐작한 주모는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나그네가 그 주막에 들어왔는데 그가 바로 이원수였다. 일이 잘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날 그 주막에는 손님이 이원수뿐이었다. 주모가 이원수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서린 기색氣色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주모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원수를 하룻밤을 모시려고 했으나 그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친정 강릉에 가 있던 신사임당도 역시 똑같이 용이 품안으로 안기는 꿈을 꾸고는,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주모의 청을 거절한 이원수도 그날 밤 집에 도착하여 부부간에 회포를 풀었는데, 이날 바로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것이다.
며칠간을 신사임당과 지낸 이원수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막의 주모가 생각이 나서 찾아가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주모가 그의 청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손님을 그날 하룻밤 모시고자 했던 것은 신神이 점지한 영특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길에 손님은 귀한 아들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귀한 인물을 얻었지만 후환後患이 있으니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는가.‘하고 묻자 주모가 다음과 같은 방도를 알려주었다.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이원수는 주모가 시키는 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은 뒤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면서 아이를 보자고 했다.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이 생각나서 거절했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000그루를 시주하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원수는 쾌히 승낙하고 뒷산에 심어놓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했다. 그러나 썩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데, 숲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스님은 호랑이로 변해서 도망쳤다. 그때부터 ’나도 밤나무‘라는 재미있는 나무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이다. 본래 강릉군 대화면의 지역으로 구름다리가 있으므로 구름다리. 또는 운교雲橋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운교역雲橋驛이 있었는데, 보안도保安道에 딸려서 강릉 방림과 횡성. 안흥으로 통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릉대도호부’편 ‘역원 조’에 운교역 :영 서쪽에 있으며, 부치에서 1백 90이리다.“라고 실려 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이 지역을 지났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강에서 동쪽으로 용진을 건너 양근․지평을 지나고 갈현(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풍수원으로 가는 도덕고개)을 넘으면 강원도 경계이다. 또 동쪽으로 하룻길을 가면 강릉부 서쪽 경계인 운교역(雲橋驛 지금의 평창군 방림면 운교리)이다. 옛날 나의 선친께서 계미년에 강릉 원이 되어 가셨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열 넷이었고 가마를 따라갔다. 운교에서부터 서쪽 대관령에 이르도록 그 사이는 평지거나 영이거나를 막론하고 길은 빽빽한 숲속으로만 지나게 되었다. 무릇 나흘 동안 길을 가면서 쳐다보아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서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서로 잇닿아서 산에는 한 치 굵기의 나무도 없다. 이를 미루어 보면 딴 고을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는 바, 착한 임금 밑에 인구가 점점 번성함을 알겠으나 산천은 손해가 많다.”
이중환의 말처럼 당시에도 산에 울창한 나무가 많기를 바라는 마음과 세상 삶의 번잡함이 서로 맞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꽃은 남녘에서 북녘으로 올라가고 단풍은 북녘에서 남녘으로 내려 온다‘는 말이 있고 봄물은 산 밑에서부터 들고 단풍은 산 정상에서부터 든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백덕산 자락의 가을 산들은 단풍이 절정이다.
수많은 장꾼들이 걸었던 길, 매월당 김시습이나 허균, 그리고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자취가 남아 있는 네 번째 관동대로를 도반이 되어 걸으실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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