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걷기 학교,
바닷가의 고울 거제도와 역사의 고장 창녕 걷기.
2012년 여름 걷기학교가 경남 거제와 창녕 그리고 함안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첫날은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는 해금강과 팔색조가 깃을 치는 학동, 그리고 노자산에서 바라보는 해남해의 푸른 바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상혼을 안고 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답사하고 주남 저수지 일대를 답사할 것입니다.
둘째 날은 나라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관룡산의 관룡사에서 용선대를 지나 화왕산을 거쳐 창녕에 이르는 길을 천천히 걷고 창녕시내의 문화유산을 걸어서 답사할 예정입니다.
셋째 날은 나라 안의 길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인 남지읍에서 양아지로 가는 개비리길과 습지 중 최고인 우포 늪 일대를 걷고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팔색조가 산다는 거제도의 해금강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현 ‘풍속’조에 “습속이 검소하고 솔직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규보가 이사관(李史館)이 부임하는 길에 전송하면서 쓴 시에 “내 들으니, 거제는 남방의 극격(極檄)으로 물 가운데에 집들이 있고 사방은 모두 호호망망한 큰 바다이다. 독한 안개가 찌는 듯 하고, 회오리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여름이면 벌보다 큰 모기가 몰려들어서 사람을 깨우는데 참으로 무섭다” 하였고, 이보흠(李甫欽)이 「신성기(新城記)」에서 “거제현은 푸른 바다 복판에 있으며 대마도와 서로 바라보인다”라고 노래한 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본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문무왕이 상군(裳郡)을 두었다가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을 얻은 거제군은, 1965년 6월에 착공하여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옥포대우조선소가 자리 잡은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한국전쟁의 상혼이 짙게 배인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있다. 이 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밝혀 놓았듯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지역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하게 되어 있어 수용소를 그때의 신현면, 오늘날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하여 장평리․문동리․양정리와 동부면의 저구리․다포리의 농토와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세웠다. 때문에 그 지역 안에서 살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부지 밖으로 소개되었다.
이처럼 큰 이동이 있고 난 뒤에 그 자리에 수없이 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가 된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명쯤이 들어왔는데, 시인 김수영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만여 명쯤이었는데, 미 해군함정이 흥남부두에서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면서 거제도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들끓는 섬이 되었다.
1951년 5월 포로수용소 내 제76포로수용소에서 수용소 사령관 도드(F. T.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4일 만에 석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인민군 대좌 이학구(李學九)가 주동이 된 이 사건에서 그들은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 줄 것과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 포로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하며 유엔군과 대치하는 한편으로 반공포로를 인민재판에 붙여 처벌하였다.
그때 고현리 제64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거제도에 자리를 잡고 사는 장낙봉씨의 말을 빌리면, 사건이 일어난 76수용소에서는 즉결 인민재판의 결과에 따라 처형을 당한 반공포로의 송장이 날마다 몇 구씩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거제 포로수용소
훗날 밝혀진 바로는 그때 죽은 반공포로가 105명에 이른다.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도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은 매듭이 지어졌으나,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간의 싸움은 더욱더 극렬해져서 마침내 따로 떼어놓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수용소의 참담한 분위기는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강용준씨의 장편소설 ?멀고도 긴 날의 시작?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고,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 에서 이명준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북한과 유엔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은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은 전쟁포로를 교환하게 되는데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었을 때 ‘중립국’을 선택한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제3의 선택으로 중립국을 택했고,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중립국으로 가는 남지나해에서 그 푸른 바닷물과 하나가 된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남미로 흘러들어가 신산했던 세월을 겪었다.
팔색조도 깃을 치는 아름다운 섬 거제도는 그러한 상처뿐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배의 땅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1170년 무신란으로 고려의 18대 임금 의종이 지금의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로 유배를 왔다. 그를 따라 들어왔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임금 왕(王)’자와 비슷한 ‘구슬 옥(玉)’자를 쓰는 성씨들이 거제도에 꽤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조선 연산군 때 우찬성 벼슬을 지냈던 최숙(崔肅)이 기묘사화로 유배를 와서 일생을 마쳤고, 숙종 때 송시열 또한 당쟁에 밀려 이 섬으로 유배를 왔다.
고색창연한 고을 영산,
지금은 창녕군의 하나의 면이 된 영산은 1914년 행정구역이 되기 전만 해도 하나의 현이었다.
고려 때 사람인 신예(辛裔)가 그의 시에서, “영취산(靈鷲山)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朱氏) 진씨(陣氏)로다.”하였고, 이백첨(李伯瞻)은, “취령(鷲嶺)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와 무사의 지략 및 가문이던가.”하였던 영산은 옛것을 아끼는 마음과 대동의식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견줄 수 없을만큼 빼어났던 고을이다.
단오날에 열리는 문호장굿, 영산 쇠머리대기, 영산 줄다리기등 이고장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고유의 민속놀이가 나라 안에서도 모두 이름난 놀이로 자리매김 된 것도 이 지역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1919년에 일어난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경남지역을 통틀어 이 영산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는 자긍심도 한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 때에는 기질이 강하고 지역성이 강한 이곳에 일본인들이 발붙이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영산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창녕군수를 군청이 있는 창녕에 있지 못하게 한 뒤 이곳에 상주시키며 가끔씩 창녕으로 출장을 가도록 하였다. 그래서 “영산의 창녕”이라는 뜻으로 ‘영창녕’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문호장사당文戶長祠堂은 교동 동북쪽에 있는 사당이다. 원래 문호장은 350여 년 전에 영산에 살던 사람으로 관원에 억눌린 평민의 원한을 풀어준 영웅이요, 신인神人으로 이 지역에서 믿고 있는 사람이다.
한번은 경상도 관찰사가 순무 중에 영산현에 이르러 길가에 놓인 농부들의 밥 광주리를 밟아버렷다. 이 것을 바라보고 있던 문호장이 신술로 관찰사의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를 않자 이상히 생각하여 조사해보니 그렇게 된 이유가 문호장이 도술을 부려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화나간 관찰사가 문호장을 체포하여 문호장을 문초하는데 곤장을 치면 몽둥이가 부러지고, 활을 쏘면 살이 하늘로 향하고, 총을 쏘면 총알대신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관찰사는 경산군 자인에다 문호장을 투옥시키려 보냈는데, 문호장이 압송을 담당했던 나졸보다 영산에 먼저 나타나니 문호장이 두 사람이 되었다.. 크게 놀란 관찰사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소원을 물었다. 그러자 문호장은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으므로 제사를 대신 지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문호장이 단오날에 죽었으므로 문호장 사당을 짓고서 단오굿과 함께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해를 입히거나 유행병이 돌면서 마을에 재앙이 든다고 한다. 제당은 네 개인데, 문호장과 그의 본처 첩과 그의 딸과 첩의 딸의 신당이 그것이다. 이 굿의 특징은 본처와 첩의 관계를 해학적으로 연출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첩을 욕하고 본처를 위로하는 등 무언극으로 행해진다. 문호장을 모신 상봉당에는 “호장문선생신위戶長文先生神位‘라는 위패가 있으며, 호랑이를 탄 노인이 그려져 잇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산신이 문호장이라는 이름으로 인격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문호장의 말을 매던 괴목을 일제 때 베었더니 그 속에서 나무 부처가 나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꿈에 나타나 되돌려주라고 하자 다시 옮겨와 지금은 문호장 사당에 모셔져 있다. 한편 영산 쇠머리대기와 영산 줄다리기는 각각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은 3.1절에 행해지고 잇지만 본래는 풍농을 기원하는 상원놀이로 온 군민의 대동 정신과 애향심을 길러주고 있다.
이 영산이 지금은 한적한 고을로 전락했지만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영산 동리를 흘러가는 동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아름다운 돌다리 만년교(보물564호)는 조선조 말엽의 빼어난 석수 백진기白進己가 만들었다. 물속에 드리운 그 보름달 같은 이 다리를 만년교 또는 원다리 또는 남천교라고 부르는데, 이 다리는 꾸밈새 없이 서민적이고 조선 후기의 민예적民藝的인 수수한 멋을 풍겨준다. 홍예를 이룬 부채꼴의 화강석은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석재 위에 장대석을 올리지 않고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겹겹이 쌓아 올렸다. 다리의 양쪽은 역시 자연석을 쌓은 석축으로 앞 뒤러 길게 연장되어 통로와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잡석으로 허술하게 쌓은 듯 싶지만 매우 견고하기 때문에 홍수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다리 입구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다리가 완성 되던 무렵 이 영산고을에는 신통한 필력을 13세의 소년 신동神童이 살고 있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그 소년의 꿈속에 자신이 산신이라는 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듣건대 네가 신필神筆이라고 하니 내가 거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다. 다리의 이름을 만년교로 정하리라.” 하고서 금세 사라지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먹을 갈아 ‘만년교萬年橋’ 의 석자를 밤을 새워 써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입구에 남아 있는 이 비석은 글씨가 기운차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 명필이 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석 끝에는 ‘십삼세서.十三歲書’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영산연지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그리 크지는 않지만 연지 가운데에 몇 개의 섬을 만들어 마치 삼신산을 연상 시키고 그 나무에 형형색색의 단풍잎으로 물드는 가을에는 그 아름다움이 한결 돋보이는 곳이 영산연지이다.
신돈의 자취서린 옥천사터
옥천마을을 지나면 고려말의 신돈(辛旽)의 자취가 서린 옥천사터가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란에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 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역사 속에 요승으로 간승으로 기록된 신돈은 이곳 옥천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영산(영산)이고 승명은 편조 자는 요공이며 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였다.
당시 고려는 국내외적으로 어지러웠다. 공민왕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전작시키려 하던 차에 신돈을 만났다. 그는 “도를 얻고 욕심이 없으며 또 천미하여 친당이 없으니 대사에게 맡기면 반드시 뜻대로 행하여 거리낌이 없으리라” 하고 생각하여 등용하기로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조정에 들어왔고, 왕의사부(왕의 고문직)가 되어 오랜 폐단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때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신돈은「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전국에 발표 하고서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성인이 나타났다”라는 농민들과 빈민들의 찬양의 뒤편에는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라는 비난이 뒤따랐다. 기득권 세력과 공민왕의 배반으로 1371년 7월 신돈은 수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신돈의 집권은 공민왕 때의 복잡한 정치상황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정치 상황이었고 신돈의 집권기간은 6년이었다. 신돈의 개혁사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만큼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과 민중고의 해결에 관심을 둔 사람이 얼마나 있었으며, 신돈에 비길 만큼 중상구제를 위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실제로 시행에 옮긴 권력가가 있었던가? 그의 등장과 그의 실패 이후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등 조선의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진 문인 세력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신돈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도 신돈은 역사 속에서 악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태어난 옥천사터는 향토문화재5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던 관룡사
불우했던 한 시대의 희생양이며 혁명가였던 신돈의 자취어린 옥천사터를 지나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 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인 관룡사 돌장승을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대나무 숲 뒤편의 관룡사에 이른다.
관룡산(739m) 중턱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26대 진평왕 5년에 증법국사가 창건하였고 원효대사가 천 여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큰 도장을 이룩하여 신라 8대 종찰 중의 하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마루의 월영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절은 그 후 경덕왕 7년에 추담선사가 중건하였고 몇 번에 걸쳐서 중수를 거듭하다가 1704년 가을의 대 홍수 때 약사전만 남기고 금당, 부도 등이 유실되었으며 이 절의 스님 20여명이 익사하는 큰 재난을 당하였다.
그 뒤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데, (보룰:212호)인 관룡사의 대웅전은 앞면 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보물 146호인 약사전은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고풍스럽고 균형미가 빼어난 건물로서 맛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집이다. 언뜻보면 부석사 조사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사방1칸의 맞배지붕의 와가에 삼중대들보가 특이한 우리나라 조선 초기의 건물로 송광사의 국사당과 함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표본으로 꼽힌다. 이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은 집체와 지붕의 구성 비례를 볼 수 있다. 기둥사이의 간격에 비하여 지붕의 폭이 두배 가까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소규모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매우 균형 잡힌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 519호)이 안치되어 있고 문밖에는 작고 아담한 석탑이 서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사채의 담 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분쯤 오르면 커다람 암벽위에 부처님 한분이 날렵하게 앉아있다. 대좌의 높이가 1.17㎡에 불상의 높이가 1.81㎡인 이 석불좌상은 높은 팔각연화대좌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결과부좌하고 앉아있는데 어느 때 사라졌는지 광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석불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사각형이고 직선에 가까운 눈 오뚝한 코 미소를 띤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우리 일행은 옛 사람들의 지혜와 부처에 대한 경이를 안고 배바위에 올랐다.
반야 용선을 타고 극락 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눈보라를 몰아오는 바람소리 들린다. 저 바람소리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들의 모든 흐르는 시냇물 소리들을 불러 모아 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미세한 떨림 들을 한데모아 이곳으로 불어오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 바람 소리는 세상의 온갖 고난 세상의 온갖 슬픔들을 다 거두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를 날을 기다리는 화왕산의 억새밭을 향해 달려오는지도 모른다.
나는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앉아있는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보물295호)아래 털썩 주저앉아 거대한 분화구처럼 펼쳐진 세상을 바라본다. 관룡산을 병풍삼아 눈 쌓인 작은 산들이 물결치듯 펼쳐나가고 영산의 진산 영취산을 돌아 계성, 옥천의 자그마한 마을들이 점점 히 나타난다. 누군가의 기원이고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르는 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꺼진 촛불아래 눈보라 맞으며 젖어 있고, 여기저기 던져진 동전들이 을씨년스럽다.
어쩌면 우리나라 부처님 중에 이보다 더 외롭게 혹은 드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없을 것이고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로 향하는 부처님 역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산길엔 눈이 가득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 남기며 간다. 우뚝우뚝 솟은 관룡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엷은 구름 속에 잠기고 희미하게 보이는 청룡암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야호, 우리 역시 그 소리의 여운을 따라 산 속으로 구름의 산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멀리 산자락들이 올라갈수록 희미해지고 가파른 산길을 시나브로 시나브로 올라서니 정상이다. 헬기장으로 사용되었을 관룡산 정상에는 발목까지 눈이 쌓여있고 우리는 그 위에 앉았다. 구름 속에 얼핏 화왕산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북쪽 의 저편에 있을 일연스님의 자취어린 비슬산은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눈 위에 앉아있는 내 가슴을 열고 들어온다. 나는 눈 덮힌 산위에서 내 살아온 나날을 뒤 돌아 본다. 그렇다 나는 이 산정에서 우우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들으며 내가 걸어온 발자국 만큼이나 “많이도 살았구나.” 깨닫는다. 얼마나 더 내 삶이 계속되고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시덥 지 않은 일들 속에 파묻혀 있다가 내가 나를 깨닫게 될까? 그러면서 내가 올라온 높이만큼 내려갈 길 또한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때는 너무 늦었을 지도 몰라 내가 그리던 세상 내가 꿈꾸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때 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을 지닌 채 자연으로 돌아갈까? 체념일까? 아니면 초월일까?
○9백의 병이 왜적과 맞선 화왕산성
산길은 무릎까지 눈에 묻혀있고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 따라 우리들은 화왕산으로 가고 있다. 화왕산은 경상남도의 중북부 산악지대로서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관룡산의 남쪽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계성천이 완만하게 흐른다. 화왕산에는 목마산성과 화왕산성이 있는데, 창녕의 진산인 이 산은 그 옛날 불을 내뿜던 화산으로 불뫼 또는 큰 불뫼로 불린다. 그 불의 왕이라는 이름처럼 정월 대보름날은 산성안 분지의 5440평의 억새를 태우는 화왕산 억새태우기로 이름이 높고 가을단풍이 물들거나 억새가 고운 모습을 드러내는 시월쯤은 억새밭의 아름다움을 보기위해 사람의 물결로 넘실댄다. 사적 제64호로 지정된 화왕산성은 높이가 1.6m에 둘레가 2.6km이며 연못이 세 개에 샘이 9군데에 군창이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해온다.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성종 때부터 폐성이 되었던 것을 개수하여 의병과 선비들 9백여명을 모아 일본군과 맞섰던 화왕산성에는 신라 진평왕 때 태사공 조계룡이 이 연못에서 태어났다는 창녕조씨득성지지라는 빗돌이 서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는 이성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가는 눈발을 머금은 바람이 세차다. 행여 날아갈세라 마음 모으고 창녕사람들이 ‘환장고개’라고 이름붙인 산길을 내려갔다. 옛 사람들이 이 산을 오를 적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환장고개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내린 눈에 어지간하면 넘어지지 않는 나 역시 두 번을 넘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산을 내려와 우리들은 화왕산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가와도 눈이 와도 산은 그냥 그 자리에 변함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가랑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이라는 작은공원에 들렀다. 이 공원에있는 대원군의 척화비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석탑 그리고 진흥왕의 척경비(拓境碑)를 보고자 함이다. 이 비는 원래 창녕읍의 목마산성에 있었다. 이비의 곁에는 성황당이 있었고 목마산성 줄기에 잇대어 고분군이 산재하여 있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러 왔던 도리이가 비석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보고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흥왕척경비가 세워진 때를 이 비문의 첫 머리에 적힌 “신사년 2월 1일”을 근거로 하여 역사학자들은 신라 진흥왕 22년인 56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 째로 오래된 비인 셈인데 이 비는 화왕산 기슭에 묻혀 있다가 1914년에 발견되었다. 두께가 30cm에 높이가 178cm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에다 23줄을 한문으로 새긴 이 비의 비문은 진흥왕이 나라 안을 살피고 다닌 발자취와 그를 수행했던 42명의 신하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차례차례 기재되어 있다. 그중에는 거칠부 같은 이름난 명장도 있고, 병탄한, 금관가야의 왕자 무력의 이름도 보이는데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로 진흥왕 14년 한성인 신주의 군수로 부임하여 백제 성왕을 쳐부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비문에는 17등의 계급과 관직들을 적은 것이고, 왕으로서의 통치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한편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들이 서로 협력하여 백성을 잘 이끌라는 유서를 담고 있을 것이다. 이때가 대가야가 멸망하기 불과 1년전 이었다. 그때 진흥왕은 창녕에 하주를 설치할 정도로 이 지역을 중요시 하였고, 이것은 창녕을 가야지역의 진출에 발판으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편 창녕에는 가야무덤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모두 허울만 멀쩡할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 총독부에 제출된 「창녕 고분도굴 조사 보고서」에서 “다른 유물들은 고사하고라도 유독 고분만은 놀랍게도 이백채가 넘는 것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이 도굴의 난을 입은 일은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라는 솔직한 고백처럼 일본인들 뿐만이 아니라 해방이 된 뒤에도 도굴꾼들의 끈질긴 도굴이 그치지 않아 그야말로 토기 한 개까지도 남기지 않은 채 고분들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식민지 시대 이 땅의 민중들은 일본에 복속당한 가야의 왕들이 일본의 왕들에게 엎드려서 조공을 바치는 치욕의 역사를 배웠다.
그렇듯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가야의 역사는 잃어버린 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고령의 대가야등 6가야의 동맹체들이 미궁 속으로 숨어들고 말았고, 일본서기에「임나일본부」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가야시대의 금관을 비롯한 금동장신구 가야 토기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으니 ’역사는 항상 이긴 자의 것‘이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창녕읍 송현동에 있는 석빙고로 향하였다. 멀리서 보면 옛 무덤 같은 석빙고에 들어갔던 창녕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에도 이 얼음 곳간 속에 들어가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된다고 하지만 사시사철 냉장고가 집집마다 보급된 요즈음에는 그 옛날의 얼음창고는 저런 형태였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다.
○시내 전체가 박물관인 창녕읍
다시 발길을 돌려 하병수 가옥과 술정리 3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은 내 어린 시절의 고향집 돌담길을 연상케 하는 묵은 길이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전의 육십년대 식 골목길들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멀리서 보아도 그 집은 알 수 있다. 집 뒤 안의 언덕위에 오래 묵은 느티나무들이 숲을 이룬 채 서 있고 집을 들어서면 무너져가는 집한 채가 서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고색창연하던 문간집이 어느새 사라지고 번듯한 나무들로 새로운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온갖 꽃들이 피어나던 여름날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사람만이 그 여름날 그대로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전주에서 왔다고 답하자 하병수옹은 환하게 웃음 지으며 집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1969년에 중요민속자료 10호로 지정된 술정리의 하병수 가옥은 오백여년 전에 지어졌다. 조선왕조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때 김종직의 문하로서 조정의 벼슬을 지내던 하자연이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내려와 살면서 지었다. 그 당시로부터 오백년이 지난 이 때까지 이 집은 해마다 지붕을 갈아 인것 말고는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고향에서는 ‘쌔’라고 부르는 억새로 지붕을 얹고 대개의 조선집에 흙을 바른 것과는 달리 듬성듬성 대나무를 엮어 지붕이 가벼워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칡넝쿨로 서까래를 묶었다. 그래서 마루에 누워 지붕을 올려다보면 저절로 “참을 수 없는 집의 가벼움”이 실감이 나는 집이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이집은 네 칸으로 동쪽에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이 차례로 붙어 있으며 못은 한 개도 쓰지 않았다. 1970년 나라에서 이집을 보수하면서 용마루에 못질을 하여 옛 모습이 변화되었다고 아쉬워하는 하자연의 17세손인 하병수옹과 작별을 고하였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찾아가는 그 길 역시 미로의 길 찾기나 다름없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인 술정리의 동탑은 기단과 탑신의 균형이 안 맞고 탑신이 단정 명쾌하며 석재의 가공 또한 예리하고 정밀하여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길만한 명 탑의 하나로서 국보 3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왕궁리의 오층석탑이 보물이었다가 요즘에야 국보로 지정된 것을 보면 신라의 유물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포늪을 걷다.
우포늪(牛浦─)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일원에 걸친 자연늪으로 1997년 7월 26일 정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토평천 유역에 1억 4000만 년 전 한반도가 생성될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담수면적 2.3㎢, 가로 2.5㎞, 세로 1.6㎞로 국내 최대의 자연 늪지다. 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 가운데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 3월 2일에는 국제습지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어 국제적인 습지가 되었다.
우포늪(1.3㎢), 목포늪(53만㎡), 사지포(36만㎡), 쪽지벌(14만㎡) 4개 늪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97년 342종의 동·식물이 조사·보고되었다. 식물은 가시연꽃·생이가래·부들·줄·골풀·창포·마름·자라풀 등 168종, 조류는 쇠물닭·논병아리·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205)·청둥오리·쇠오리·큰고니(천연기념물 201)·큰기러기 등 62종, 어류는 뱀장어·붕어·잉어·가물치·피라미 등 28종, 수서곤충은 연못하루살이·왕잠자리·장구애비·소금쟁이 등 55종, 패각류는 우렁이·물달팽이·말조개 등 5종, 포유류는 두더지·족제비· 너구리 등 12종, 파충류는 남생이·자라·줄장지뱀·유혈목이 등 7종, 양서류는 무당개구리·두꺼비·청개구리·참개구리·황소개구리 등 5종이 서식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수많은 문화유산과 역사의 길을 걷게 될 이번 걷기 학교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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