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해파랑길>을 걷다.-그 열 번째 강릉 경포대에서 속초까지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 2017년의 정기기행 그 열 번째가 겨울의 초입 인 11월 넷째 주인 24(금)일에서 26(일)일까지 2박 3일간에 걸쳐 경포대에서 속초에 이르는 구간을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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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 태어난 사천
순포해수욕장과 가둔지 마을을 지나자 사천해수욕장이 펼쳐진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천리에서 최초의 한글소설인『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조선시대 혁명가이며 빼어난 문장가였던 교산 허균이 태어났다. 교산蛟山은 오대산에서부터 뻗어 내린 산자락의 굽이진 모양이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기어가는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교산 아래 허균의 외가이며 생가였던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다. 중종 때 예조참의를 지낸 김광철金光轍이 부모를 위하여 정자를 세우고 날(日)이 감을 아끼어 애일당이라 짓고, 벼슬마저 내어놓고 부모를 섬겼다는 애일당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고향 사랑이 지극하였던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지었는데, 그 산 중턱에는 <누실명陋室銘>이라는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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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반 항아리 달이고
향 한 심지를 피웠네.
외딴 집에 누워
건곤고금乾坤古今을 가늠하노니
사람들은 누추한 집이라 하여
살지 못하려니 하건만
나에게는 신선의 시계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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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2년 양천陽川이 본관인 경상 감사 허엽許曄과 강릉이 본관인 예조 판서 김광철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3남 2녀 가운데 막내둥이였던 허균은 자는 단보端甫이며 호는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라고 불렸다. 총명하고 뛰어난 재기를 타고났던 허균은 역모죄에 몰려 죽은 인물 가운데 조선 시대 기축옥사의 주인공인 정여립과 함께 오늘날까지 신원되지 못한 두 사람에 꼽힌다. 그러나 홍길동전 및 그가 지은 수많은 글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니, 한 개인의 삶의 족적이나 국가의 역사를 당대에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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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구제의 보살행으로 스님의 절은 받은 어린아이
용소동과 교황리를 잇는 다리 사이에 제주솔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조선 인조 시절에 이상혐李尙馦이라는 사람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소나무 씨를 얻어다 둑을 쌓고 심었다.
오리진을 거쳐 1918년에 세웠다는 주문진 등대를 지나자 주문진 해수욕장이 넓게 펼쳐진 향호香湖리이다. 향호 해수욕장을 지나자 양양군 현남면이다. 현남면 원포리, 화상천和尙川가에 있는 그곳에서 약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화상천 바위가 있는데, 조선 선조 때 최운우崔雲遇가 어린 시절 이곳 해변에서 놀다가 물고기를 잡게 되었는데, 그것을 도로 물속에 넣어주어 살려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길을 지나다 그 모습을 보고 기특하게 생각하게 된 스님이 아이를 화상천 바위 위에 앉히고 절을 하였다고 한다.
남애리 동쪽 바다에 바위 섬으로 떠있던 양야도陽野島는 1938년 방파제 공사를 하며 육지에 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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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포 큰 나루
양양군 현남면 광진廣津리, 큰 나루가 있어 광나루라고 불리는 그곳에 동해의 숨겨진 비경으로 근래들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휴휴암休休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휴휴암, ‘몸도 쉬고 마음도 쉬어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모두 내려놓고 쉬고 또 쉰다’는 뜻을 가진 암자.
쉰다!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그 말이 주는 설레임은 그저 설레임으로 남겨둔 채 결코 멈추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라니……
“사람이 넉넉함만 기다리나 어느 때 넉넉하리. 늙기 전에 한가해야 이게 바로 한가한 것,” <순오지>에 실린 글처럼 늙기 전에 한가해야 쉬고 또 쉴 것인데, 사람들 대부분이 그 때를 알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가 횡거橫渠선생의 말을 따르며 사는 것도.
“살아 있을 때 나는 우주를 따르고 섬기며, 죽으면 나는 편히 쉰다.(生吾順事設吾寧也)”
번뇌망상을 모두 내려놓고 오래도록 쉬고 싶지만, 가야 할 길……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마음을 두어 일어난 이 번뇌를 떨치지 못하고 발길을 옮긴다.
휴휴암은 바닷물에 잠겨있다 해수면이 낮아질 때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관세음보살님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관세음보살상은 묘적전 법당이 올려다 보이는 해변에 낮은 절벽을 만든 바위 아래, 바닷물이 들락날락 거리는 돌무덤에 위치한 길이 13m의 바위인데, 보면 볼수록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관세음보살 모습을 닮았다. 뿐만 아니라 바닷가 주변에서 관세음보살과 똑같은 신기로운 형상을 이룬 바위를 비롯해 선명한 발가락 모습 등 온갖 기이한 형상을 이룬 바위들을 발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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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과 조준이 놀았던 하조대
하광정리 서쪽 발감동은 불개미가 많다고 하여 발개미라고 부르는 마을인데, 마을 동쪽 동해 가에 하조대河趙대가 있다. 바닷 가에 기이하게 솟은 이 바위는 조선 개국공신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놀았던 곳이라 하는데,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하조대, 관아의 남쪽 30 리에 있다. 나지막한 산기슭이 바다 속으로 뻗어 들어가다가 갑자기 끊어져 하조대를 이룬다. 하조대 좌우에는 바위벼랑이 기이하고 예스럽다. 바다의 큰 파도가 세차게 부딪치면 눈보라가 휘날리는듯하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조선 건국 초기에 하윤과 조준이 노닐며 구경하던 곳이라고 한다. 까닭에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이세근李世謹이라는 사람이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는 석자를 바위에 새겼다. 이곳에 1939년 팔각정을 건립하였으나, 6.25때 소실되자 1955년에 다시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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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 해수욕장을 지나 양양군 손양면巽陽面에 당도하였다.
양양군 손양면 상운리는 조선시대 상운역祥雲驛이 있었다 하여 역말이라고도 하였었다.
상운리 동북쪽 상운정터는 바닷가에 낙락장송이 10리를 연해 있어서 낮에도 해가 보이지 않으며, 소나무 사이에는 오직 철쭉만 있어서 봄이 되면 철쭉꽃이 만발해서 붉은 비단을 펴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고려 때 시인 김극기가 이 지역을 지나다 시 한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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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에 전진前塵 없음이 여러 해라. 꽃 피고 새 우는 것도 모두 즐거워한다. 천 수레 흰 눈 같은 실을 켜는 땅이요, 만 이랑에 누런 구름 같은 보리를 베는 시절이라, 어부 낚시터엔 이끼가 뒤섞였고, 초동樵童 앉은 두렁위엔 풀이 우거졌네. 오가며 훌륭한 경개 더욱 구경할만한데, 일찍이 시인을 시켜 몇 편이나 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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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찾아온 낙산사
의상과 함께 신라불교의 쌍벽을 이루던 원효 역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곳으로 오던 중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났는데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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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양양부근에 이르렀을 때 흰옷을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된 원효가 여자에게 ‘벼를 줄 수 없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냉담하게 “벼가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가던 원효는 개울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을 만나자, 그녀에게 물을 청하였다. 그러자 여인은 빨래하던 물을 한바가지 떠주었다. 그 물을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원효는 물을 쏟아버리더니 냇물을 떠서 마셨다. 그 순간 들 가운데 서 있던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며 “휴제호 화상아”라고 부르짖으며 사라져 버렸고 파랑새가 날아간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의아하다 생각하며 원효가 낙산에 도착하는데, 관음상 아래 신발의 다른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때서야 원효는 벼를 베고 있던 여인과 빨래하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원효가 의상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받았다는 굴속을 찾아가려 했지만 풍랑에 의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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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관음보살을 만나고 원효는 관음을 만나지 못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두 스님은 신라 불교를 대표하면서도 서로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의 귀족, 진골 출신이었던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가서 화엄종(華嚴宗)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왕실의 절대 지지를 받으며 명산마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우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육두품 출신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으나 도중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것을 계기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어 그 길로 유학을 포기하였다. 그 뒤 원효는 나이 들어 누더기 옷을 걸치고도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라는 내용의 깨달음의 노래, ‘무애가(無㝵歌)’를 부르고 다녔다. 그렇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노래와 저작으로 불교사상을 대중 속에 뿌리내릴 수 있게 하였던 원효는 속세에 연연하지 않고 개인적 실천과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겼다.(...)
속초는 풍광이 아름다운 작은 포구였다. 그랬던 마을이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라는 노랫가락에서 언급되는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군사작전, 일명 ‘흥남 철수 작전’으로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인 함경도와 인접한 이곳 속초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속초는 실향민들이 만들어낸 모습이 많은 지역이다. 특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바이마을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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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 한류열풍을 일으킨 겨울동화의 무대
아바이마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드라마 <겨울동화>를 통해서이다. 마을 전체가 드라마 세트장이 되었던 그곳에는 ‘은서네 집’이 되었던 수퍼마켓이 여전히 남아 있고 음식점마다 은서역을 맡았던 송혜교 사진을 걸어두고 있다.
그런 풍경을 보며 우리나라에서 방송매체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한다.
우리 일행은 은서 수퍼 앞 도로 청호 고향로 649번지 단천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여 순대국을 먹었다.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 운항하는 갯배를 탔다. 배 삯이 편도 2백 원이다. 예전에는 3백 원이었는데, 언제 내렸는가? 세상 물가가 온통 오르기만 하는 데…… 가격을 내린 그 심정이 어땠을까. 모르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을 느낀다. 그렇게 싼 가격인데도 사람들은 작은 내(川) 같은 거리를 건네주며 돈을 받는다고 불만(무엇에 대해서요?)을 드러낸다. 배를 타고 건너 걷다보니 동명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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