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5

이름값을 하고 산다는 것,

산중산담 2017. 11. 23. 11:41

 

이름값을 하고 산다는 것,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여럿인 사람도 있고, 호를 짓기도 하고, 작명가에게 가서 이름이나 호를 지어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까지 쓰는 경우도 있다.

자기가 쓰는 이름이 싫어서 이름을 개명하는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늘어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다.

어떤 사람이 나더러 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럭저럭, 아니 그냥저냥 살아가는 사람이 무슨 호가 필요하냐고 말해도 자꾸 호를 지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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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조선 역사 속에서 이름과, , 그리고 자가 많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추사 김정희, 매월당 김시습, 그리고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이덕무가 아닐까 싶다.

이덕무가 선귤당蟬橘堂이라는 당을 짓자 다음과 같은 연암 박지원이 <선귤당기蟬橘堂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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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처자嬰處子(이덕무의 자)가 당을 짓고서 그 아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지었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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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김시습의 자)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며 열경에게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게.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 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 손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胸背나 서대犀帶나 어과魚果처럼 벗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리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 몸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버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매미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襁褓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이름을 골라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이 모든 것이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 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가 없을 수 없으니, ‘에게 와서 짝이 되어 마침내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 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서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명산名山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덕을 나타내기 위해 자를 짓고 사는 곳에 호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冠雀이라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를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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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에 나오는 이야길세. 열경(김시습)은 은자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때부터 호가 있었지. 때문에 대사가 이를 경계한 것이네. 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굴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가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고, 처녀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 이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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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영처자(이덕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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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그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만한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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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본체를 깨닫고, 그 실체에 맞는 이름을 짓고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그것은 저마다 자기의 실체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표현 되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의 무게와 같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그렇다고 생을 포기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이 시대에 저마다의 그 독특한 이름값, 아니 꼴값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신기하고 기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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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1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