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5

우울증을 치료하는 최상의 치료제, 걷기!

산중산담 2018. 4. 26. 20:38

 

우울증을 치료하는 최상의 치료제, 걷기!

 

청소년 시절을 혼자서 독학하면서 가난하게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 다 그렇다.

우울하고, 어둡고, 그리고 외로움을 많이 타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시절을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천성적으로

우울증환자라서 그런지,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그 습관이 변하지 않아, 기뻐해야 할 때도 진정으로 기뻐할 줄 모르고,

슬퍼 할 때면 더욱 더 슬퍼지는 마음, 그게 본래의 나였다.

그런 나를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눈치를 전혀 못 채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자칭 우울중 환자라고 말하면

우울증 환자는 본인이 우울증 환자라고 여기지 않는다면서,

코웃음을 치고 만다. 과연 그럴까?

탁월한 모든 인물은 우울하다.” 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우수한 사람들이 그랬다.

스물일곱 살의 전도양양한 젊은 가수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세상에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

이유가 어떻든 결과는 우울증 때문이라는데,

우울증은 어떤 사람에게 찾아오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울증 환자란, 자기의 괴로움, 자기의 손실, 자기의 결함을 막다른 곳까지 골똘히 생각할만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정신력을 발휘하는 데 기쁨을 갖는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몸을 담고 있는 영역은 너무나 협소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목초牧草를 다 먹어치우면 마침내 그는 지푸라기까지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질투심 많은 남자로, 또는 인색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다음에는 보기만 해도 메스꺼운 그런 사람이 된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방랑자와 그 그림자에 실린 글이다.

이 모든 게 마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색채도 아니고, 빛도 아니고, 무덤도 아니었다. 그것은 몽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서, 이 표현할 수 없는 총체가, 이 고요한 하늘이, 이 우울한 시간이 내 속에 침투해 오게 하였다. 내 정신 속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나는 지금 알지 못한다.

그것을 말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자기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잠들고 무엇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는 그 지울 수 없는 순간 중의 하나였다.”

빅토르 위고 <몇 개의 야릇한 사암 도시> 중에 실린 글이다.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도 나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다. 남몰래 내 방에 돌아와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못 견디도록 고통스러운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우울증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죽음인가? 나를 파멸로 끌어가는 것음 무엇인가? 복수의 여신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죽어야 하는 것이라면, 내 손으로 목숨을 끊은 들 무슨 상관이랴. 무엇 하나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없다. 인간은 왜 이다지도 타락하고 쓸모없이 되었단 말인가?

인생의 즐거움은 맛볼 수 없고, 괴로운 체험뿐이니, 인생은 나에게 있어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함께 살아오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생을 참고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귀찮을 뿐이다.”

세상을 뒤흔들었던 영웅인 나폴레옹이 열여섯 살 때 쓴 글이다.

이렇게 저마다 깊거나 얕거나 간에 슬픔의 시절이 있으면 기쁨의 시절도 있다.

그런데, 기쁨보다는 슬픔의 시절이 더 가슴 깊이 각인되는 것은

슬픔이나 고통이 영혼에 더욱 더 깊고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영국의 문호인 셰익스피어도 말하지 않았던가?

슬픔과 우울은 언제나 혼자 오지 않는다. 뒤에서 떼를 지어 몰려오는 법이다.”

나는 즐거운 것과 자살적으로 우울한 것 사이에 있는 기질, 평균적으로는 다혈질이고 정열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자살적 우울증의 기질이 나를 붙들거나, 아니면 콜레라에 걸린 듯 열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어떤 때는 슬픔이 나를 압도하고, 어떤 때는 경쾌함아 나를 압도한다.”

몽테뉴의 글이다.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우울증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 버렸다. 너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협만에 걸린 타오르는 핏빛 구름을 보았다. 친구는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무서움에 떨었다. 나는 나를 에워싼 분위기가 하도 고통스러워 끝없이 외치고 싶었다.”

<절규>라는 그림을 그린 뭉크가 쓴 1892년 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칠흑처럼 어두운 우울증을 그나마 치료해준 것은 걷기였다. 나는 걸으면서 우울증을 치유했고, ‘강하게 살아남아라!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라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의 한 소절을 힘들 때마다 떠올렸다,

 그러면서 나약함과 자신 없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걷기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병적 증상(우울증)을 모두 다 치유하는 최고의 약이다.‘ 라고,

그대! 우울한가? 그렇다면 걸어라.


  20171220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