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5

고금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밖에 없다.

산중산담 2018. 4. 26. 20:39

 

고금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밖에 없다.

고금古今이나 지금只今이나 세상은 항상 소란하다.

문을 열어도, 문을 닫아도 떠들썩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고해苦海라고 말하면서도, 그 고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떠밀리듯 떠나고서야

고요한 세상, 인적 끊긴 세상의 쓸쓸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꽃 피면 날마다 스님과 약속을 하고

꽃 지면 열흘 지나 대나무 사립문 닫는다.

모두들 이 늙은이 정말 우습다 하니

한해의 근심과 즐거움이 꽃가지에 있다 하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이산해의 <이 늙은이>라는 시다.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자 한음 이덕형의 장인이었고,

장인과 사위가 둘 다 영의정을 지냈다.

하지만 그의 인생 역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 16세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월송정과 망양정이 있는 울진 평해로 유배를 가서

온갖 고난의 세월을 보냈기 때문인데,

그 때에 깊이 있는 문장이 쏟아져 나온 것은 그 무슨 연유인지,

서리 내려 나뭇잎 빌 때 성긴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는다.

바람에 나부끼는 노란 잎은 옷소매에 점점이 떨어지고,

들새는 나무 우듬지에서 날아올라 사람을 엿본다.

황량한 땅이 이 순간 맑고 드넓어진다.”

상촌 신흠申欽<야언野言>에 실린 글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신흠의 삶, 역시 굴곡이 심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쓸쓸하지만,

쓸쓸함과 허허로움을 넘어선 여유가 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던가,

송나라의 문장가 구양수는 말했지,

좋은 시는 곤궁한 다음에야 쓸 수 있다.‘

추녀 끝에 걸어놓은 풍경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비로소 그윽한 소리가 난다.

인생도 평온무사만하다면,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괴로운 일이 있다.

이같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오고 가고 뒤엉키어 심금에 닿아서

그윽한 인생의 교향악은 연주되는 것이다.“

롱펠로우의 말이 더욱 더 가슴을 파고드는 겨울이다.

고금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밖에 없는데,

지금도 손바닥에서 모래가 새어나가는 것처럼

자꾸만 과거라는 이름의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가는데,

나는 그 사라져 가는 것을 붙잡지 못한 채 멀건이 아니

멍한 채 바라보고만 있다.

과거는 장례식처럼 지나가 버리고, 미래는 달갑잖은 손님처럼 온다.‘는데,

 

 

 

 

20171221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