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삶이 괴로운가, 삶과 죽음이 괴로운가?
날은 몹시 춥고 들리는 소식은 쓸쓸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까? 아니면 삶을 마감하는 것이 나은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은 계속되고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들에게 삶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오늘 무술년 1월 27일 의성의 답사 길에 가게 될 인각사에서 입적한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편 실려 있다.
“신라 경사(京師, 경주)의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사는 한 과부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과 기동을 못하였다. 그래서 사동蛇福(, 또는 사복蛇童, 두 가지 다 아이라는 뜻임)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가 고선사에 있었다. 원효가 사복을 보고 맞아 예로써 맞이하자 사복이 답례를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와 내가 옛날 경經을 실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같이 가서 장사지내는 것이 어떠한가?“
“좋다” 원효가 그렇게 대답 한 뒤 둘이 같이 집에 왔다.
사복은 원효로 하여금 포살 수계를 행하게 하였다. 원효는 그 시체 옆에서 다음과 같이 빌었다.
“나지 말지어다. 그 죽음이 괴롭도다. 죽지 말 지어다, 그 남이 괴롭도다.”
사복이 그 말이 번거롭다 말하자 원효가 다시 말했다.
“죽음과 삶이 괴롭도다.”
둘이 시체를 메고 활리산 동쪽 산록으로 가서 원효가 말했다.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에서 장사지냄에 좋지 않겠는가?” 그러자 사복이 계를 지었다.
“옛날 석가모니불이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으로 들어갔으니 지금 또한 저와 같은 자가 있어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노라” 그 뒤 띠 풀을 뽑으니, 그 아래에 휘황찬란하고 훌륭하게 누각이 장엄한 세계가 나타났는데 인간세상과 달랐다.
사복은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그 화장세계 속에 들어가니, 그 땅이 본래처럼 아물어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의해’편에 실린 ‘말하지 않던 사복(蛇福不言)’ 조목의 이야기다.
일연스님은 그 이야기의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말없는 물, 잠자는 용, 어찌 만만히 보랴,
이 세상 떠날 때에 간단한 한 마디 말, 살고 죽음이 괴롭다.
하되, 원래가 괴로움이 아니었다.
드러나고 숨고, 살고, 죽고 세계는 넓으니라.“
삶이 괴롭다 말하면서도 삶이 끝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비명에 세상을 등진 사람 앞에서는 그 누구도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일연스님은 <월명과 도솔가>에서 또 하나 슬픈 노래를
지었다.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해 제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광풍이 불어서 ‘종이 돈’이 날려 올라가 서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월명이 그 때 부른 노래가 <제망매가祭妄妹歌>라고 불리는 <월명사>다.
생사生死의 길이란
여기 있으려 하지만 있을 수 없어,
나는 간다는 말씀도 이르지 못하고
가버리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진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선
가는지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것이니,
내 도道 닦아 기다리리라.
밀양에서, 그리고 세상의 이곳 저곳에서 비명에 생을 마감하신 분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원효가 바라 본 그 화장세계로 가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8년 1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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