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5

우리가 역사의 현장에서 배우는 것들,

산중산담 2018. 4. 27. 00:01

 

우리가 역사의 현장에서 배우는 것들,

 

답사라는 것이 그렇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아니 열 번 스무 번을 가도

알 수 없는 곳들이 있고, 가면 갈수록 마음이 편해지면서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함을 느끼는 곳이 있다.

이번 주말에 가는 다산 초당과 두륜산 일대, 그리고 화순의 운주사 일대다.

가고 또 가도 물리지 않고, 가슴이 뛰노는 곳, 그곳에 가면 다산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이 있고 그곳서 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다산만이 아니라 추사 선생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보정산방寶丁山房글씨는

추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의 아들 정학연과 추사 김정희의 인연에 대해

조선의 마지막 선비인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정 다산과 김 추사

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다산은 타고난 재분이 뛰어난데다 백가百家에 관통하였다. 그러나 오직 실용에만 힘썼기 때문에 그의 저술은 고인의 법도에 그대로 맞기를 구하지 않아서 약간 잡박한 병통이 있었다.

비록 마단림馬端臨. 고염무顧炎武 같은 학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으나 그의 문장은 명. 청 이래의 여러 명가에는 끝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저것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일찍이 추사 김정희를 초청하여 <여유당집>을 고찰, 교정하여 취사선택해서 확정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추사가 그의 저작을 살펴보고 나서 유산에게 말했다.

선생의 백세 대업은 진실로 위대합니다. 그 저작에 대해서 나는 실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능히 취사선택을 하겠습니까? 어찌 전고全稿를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에 양자운揚子雲을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추사는 글을 짓는 천성이 경직되고 껄끄러워 소품과 척독을 남기는데 그쳤지만. 빼어난 재주에다 박학하여 참으로 독자적인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사대부는 당파가 나눠진 이후로는 비록 통재, 대유라 일컬어지더라도 대부분 문호門戶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언론이 편파적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마음을 평탄하고 넓게 쓰는 데 중점을 두어 오직 옳은 것을 좇아 배우기에 힘쓸 뿐, 선배에 대해서 전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남인들에게 경시 당했다.“ <매천야록>

19세기 조선 후기까지는 추사 김정희 보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세상의 평이 호의 적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총망 받는 사대부였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유배를 가서 혹독한 고난의 세월을 보낸 뒤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조선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만큼은 확실하다.

만약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으로서 일을 삼아서 다만 속이 텅 비고 엉성한 잔꾀로서 방법을 삼는다거나 그 올바른 이치를 찾지 않고 다만 잘 못 얻어들은 말로써 주장을 삼는다면 이는 성현의 길에 어긋나는 일인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실사구시론>에서 선비의 나아갈 바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역시 인간이 살아가야 할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난을 당했다 하여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를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도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 땅을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것, 그것이 올바른 문화답사의 나아갈 길이다이번 답사에서는 무엇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2018130,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