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동해바다에 아득하게 떠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가다.
2018년 3월 30(금요일)에서 4월 1일까지 푸른 동해 바다 먼 곳에 있는 섬 울릉도와 독도를 갑니다.
동해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울릉도는 강릉에서 배를 타고 3시간쯤 간 곳에 있습니다. 독도와 함께 나라에서 제일 동쪽에 자리 잡은 울릉도와 독도를 가고자 하는 분은 미리 접수하십시오.
“울릉도는 경상북도 동해상에 위치한 섬이다.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서 직선거리로 137킬로미터, 죽변항에서 140킬로미터, 포항에서 217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울릉도를 ?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산도(于山島=울릉도)는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도부터 삼척시 원덕읍에서 다니기 시작한 쾌속고속정(여객선 터미널에서 타면 일반 51,100원, 우등 11만원)을 타면 3시간 30분이면 울릉도에 닿을 수 있다. 포항시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이 섬은 불과 120년 전인 1882년경 개척령이 내려졌을 때만 해도 인구 116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개척이 진점됨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 1975년 무렵의 인구밀도가 전국의 평균치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울릉도의 초기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서기 246년에 중국 위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한 사실을 기록한 ?위지(魏志)?에 “동해에 또 하나의 섬이 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강릉) 군주가 되어, 우산국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놓아서 죽이리라’ 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씌어 있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의 사람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와서 토산물을 헌납하였다. 의종 13년에 왕이 울릉도가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이 살만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명주도감창溟洲道 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 섬 중에 큰 산이 있는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이만여 보步요. 서쪽으로는 1만 3천여보, 남쪽으로는 1만 5천여보요. 북쪽으로는 8천여보이고, 촌락 터 일곱 곳이 있고, 혹 돌부처. 무쇠 종. 돌탑이 있으며, 시호柴胡. 고본藁本. 석남초石南草가 많이 납니다.”하였다.
?고려사?에는 고려 초인 현종 9년에 동북지방의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입하여 섬을 쑥밭으로 만들었다고 씌어 있다. 울릉도는 이처럼 잦은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현종 때부터 거의 빈 섬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13세기 초에 고려의 무신인 최충헌이 울릉도를 적극으로 개척하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오고가는 것의 어려움을 들어 섬을 비워두는 소극책을 썼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부역을 피하여 이 섬에 숨어 들어와 사는 사람이 있어 조선 태종 때에 삼척사람 김인우(金麟厚)를 시켜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때 그곳에 다녀온 김인우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토지가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다릿목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사의 크기는 됫박만한데, 모두 물건이 다 이렇다.”
조선 성종 2년에, 따로 삼봉도가 있다는 보고를 한 사람이 있어, 박종원朴宗元을 보내어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배를 대지 못하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배 한 척이 울릉도에 정박해 있다가, 큰 대나무와 큰 북어를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섬 중에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가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왜병의 불 지르고 약탈하는 일을 당하여 다시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근래에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했다고 들었다. 더러는 의죽도라고 일컫는데 곧 울릉도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만 울릉도로 들어갔고 세종 20년에는 울진현사람인 만호(萬戶)․남호(南顥)를 보내어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눈앞의 옥토인 울릉도에 들어가는 주민이 날로 늘어나 성종 때는 1천 명쯤에 이르렀다고 한다.
울릉도는 실존여부와 무관한 우리 민족의 이상향으로 알려져 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곳이다. 또한 나라의 법을 어긴 범법자들이 많이 숨어들었는데, 아래의 글은 영조 연간 경기도 충청도 백성들을 동요시킨 괘서와 투서의 내용이다.
삼봉도라고 불리던 울릉도
“삼봉도가 동해 가운데 있으며, 둘레가 심히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예로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다. 빈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하여 망명 역적인 황진기가 장군이 되어 정진인鄭眞人을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오고 있다. 청주와 문의가 함락되고, 서울이 함락될 것이매, 이 씨 대신에 정씨가 들어서서 가난 정진인 설 뿐만이 아니라 한말에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 등 어수선한 환경을 틈타 그 곳으로 갔으며,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는 동학의 잔존세력들이 숨어들었던 곳이기도 하다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울릉도가 개척된 배경에는 한때 한반도 동남쪽의 여러 섬들을 개척하는 벼슬을 맡았던 김옥균이 있다. 고종 19년(1882)에 개척령이 내려지기 전만 해도 그곳에서는 한국인 116명과 일본인 79명이 나라의 허락 없이 몰래 숨어들다가 도벌이나 미역과 약초를 따서 생활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미인과 바람과 향나무가 많다
도둑․거지․뱀이 없고, 바람․향나무․미인․물․돌이 많다고 하여 삼무오다(三無五多)의 섬으로 불리는 울릉도에는 특히 바람 부는 날이 많다. 한 해에 바람기가 잠잠한 날은 70일쯤 밖에 안 되고 평균 풍속이 초속 4.5미터에 이르며 폭풍이 이는 날이 179일이나 된다.
독도는 우리 땅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독도가 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로 널리 알려진 독도는 동도와 서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36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섬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명칭은 우산도이다.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 동해상의 두 섬을 우산과 무릉. 혹은 우산과 울릉이라고 표기하였다.
조선 성종 때인 1476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나란히 있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라고 실어서 지금의 독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1794년인 정조 8년에 강원도 관찰사인 심진현沈晉賢이 울릉도 보고서를 보냈는데,“ 갑인년 4월 26일에 가지도可支島에 가보니 가지어가 놀라 뛰어나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는 이 섬을 가지도로 보았음을 알 수가 있다.
가지어는 물개의 일종인 강치의 우리말인 ‘가제’를 음역하여 부른 것으로 추정하는데, 가지도란 강치가 많이 사는 섬이란 뜻이다. 지금도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살고 있으며, 서도 북서쪽에는 가제바위란 바위가 있다.
1900년인 고종 37년에 칙령 제 41호를 발표하면서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인 ‘죽도 및 석도‘로 규정하면서 처음 석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울릉도 근방의 작은 섬인 죽서竹嶼를 지칭한 것인데, 석도는 한글 표현의 돌섬이고 돌의 사투리가 ’독’ 인 점을 감안하면 그때부터 독도가 명칭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호남대 인문사회연구소가 밝힌 내용에 의하면 독도의 이름을 전라도 사람들이 지었다고 한다. 1882년 고종 때 이규원 감찰사가 울릉도 주민을 조사한 결과 전 주민 141명 가운데, 전남 출신이 115명, 강원 14명, 영남 11명, 경기 1명이었다. 전남 지역민 중에서도 흥양군(고흥) 출신이 61명, 흥해군(여수) 낙안읍성이 있는 낙안군 출신이 21명 순이었다.
독도를 석도로 표기했는데, 이 명칭은 돌의 전라도 사투리인 ‘독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전라도 고흥의 금산면 오촌리 앞바다에는 지금도 독도라는 섬이 있다.
1904년 9월 25일자에 일본 군함 니다카호의 보고에 의하면 “리앙코르트 바위를 한인들은 독도라고 쓰고, 일본 어부들은 ‘리앙코도‘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도는 그 이전부터 써온 이름이지만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06년 울릉군수 심홍택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천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 1906년 기록에는 “울릉도의 바다에서 동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독도라는 한 섬이 있어 예부터 울릉도에 속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 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하기문>에도 “울릉도 100리 밖에 한 속도가 있어 독도라고 부른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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