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승에도 홍시가 있는지요?,
어젯밤, 어머님의 제사를 지냈다.
이런저런 일로 식구들이 많이 빠지고,
아주 단촐 하게 제사를 지내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홍시와 옥수수를 좋아하셨는데,”
막내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는 유독 홍시를 좋아 하셨다.
긴 겨울 밤, 눈이 내려 쌓여 행상을 못 나가실 때
장독에 간수했던 홍시를 내어와 껍질을 살짝 벗긴 후 건네주시던 홍시,
어머니가 계신 저승에도 생전에 그렇게 좋아하셨던 홍시가 있을까?
아련히 떠오르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던 그 시절,
학교를 가지 않아서 공부를 할 일이 없고, 빈둥빈둥 놀았기 때문에
나에겐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이 주어졌다.
“깔(꼴) 베어와라.” “염소 몰고 와라”
“우여 우여 하면서 새 봐라” “비 오면 곡식 담고 멍석 말아 놔라”
“얘기 보라” “아랫집에 가서 물 길어 와라”
“술 사와라” “보리밭 밟으러 가자” “보리 베러 가자” “모심으러 가자”“
나락(벼) 베러 가자” “나락 뒤집으러 가자”
“나락 담자” “논에 물 말랐는가 보고와라”
“고추 따러 가자” “감자 심으러 가자” “감자 캐러 가자“
”고구마 놓자” “고구마 캐러 가자” 눈 쓸어라“
”감 따라“ ”솔(부추) 베어 와라“
”미나리 꽝(밭)에 가서 미나리 비어(베어)와라.“
또는 “고모 오는가 내다봐라.” ”삼촌 오는가 내다봐라.”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전화가 없던 그 당시에는 일중의 하나였고,
그러한 일들이 내가 담당했던 이런 저런 일의 종류였다.
그런데 나는 내가 생각해봐도 일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 자신 있는 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으므로 힘도 없었고,
말도 없는 편이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도 못했으며,
항상 있는 둥, 없는 둥 하니, 무슨 일을 야무지게 할 수 있었겠는가?
우두커니 서서 딴 생각만 하다가 보니 가끔씩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자는 왜 맨 날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서 있기만 한 다냐,”
나 혼자 욕먹는 것은 그냥 들을 만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은 내가 잘 못해서 그렇잖아도 미운 살이 배긴 어머니까지
할머니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저 그 에미를 닮아서 게을러 터져 가지고 쯧쯧“하면서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아이고, 잘했네. 우리 큰 손주.“
“기쁨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그림자가 지나간다.”
<아미엘의 일기>에 실린 글이다. 그랬다.
그 당시 어두웠던 시절이라고 해서 어디 조그만 기쁨조차 없었겠는가만,
기쁨 뒤에 도사린 슬픔이 너무 깊어서,
내 기억 속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답답하면서도, 벗어날 길 없던 그 시절들도 다 지나가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서
어머니의 제삿날 이미 먼 나라로 가시고 안 계신
어머니를 회고하는 한 사내,
내가 이렇듯 새벽에 잠 깨어 어머니를 회상하듯,
저승이 있다면 어머니도 그 저승에서
나를 굽어다보며 내 생각에 잠겨 있을까?
시간은 흘러 어둠을 자꾸자꾸 몰아내는 이 새벽에,
2018년 2월 8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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