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5

‘추억은 사랑의 가장 확실한 토대.’라는데,

산중산담 2018. 4. 27. 13:16


‘추억은 사랑의 가장 확실한 토대.’라는데,


 

나는 밤새, 추억의 바다에서 뛰어 놀았다.

오월의 봄, 어린 소년이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에서, 대추나무로,

호두나무로, 붉디붉은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감나무로

느릿느릿 오가는 사이, 가을이 가고,

흰 눈이 하얗게 내린 마당에 남긴 작은 발자국,

외롭게 어딘지 모를 길로 나서던, 옛집의 추억,

나는 추억 속을 노닐던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소년 옆이거나 앞뒤,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 추억의 바다에는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만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던

소금기 머금은 바람조차 없었다.

 

설날, 새벽, 조용하다. 조용함 속에서

추억들을 추억한다.

추억은 어딘가로 가서 숨어 있으면서 가끔씩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꾸 그리움처럼 오는 것일까?

단테는 말했지,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행복했던 추억보다 불행했던 추억이 많은 나에게는 오히려

키케로의 말이 더 친근하다고 할까?

지나간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고통과 감미로움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어쩌면 그 질량質量은 같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지,

 

되다만 추억은 필요한 것보다 더 나빠요,

삶을 만들려고 계속 말해대거든요."

 

내 추억들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되다 만 추억, 미완성인 추억,‘

그래서 새벽의 꿈이 그렇게 선명하면서도 어수선했던 것일까?

 

니체는 <나는 왜 이렇듯 현명賢明한가?> 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지,

 

사람은 아무것으로부터 뿌리치고 올 줄을 모르며,

아무 것도 함께 끝낼 줄을 모르며, 모든 것에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과 사물이 너무 집요執拗하게 서로 붙어 다니며,

경험은 너무 깊은 곳을 맞추고, 추억은 하나의 곪은 상처 같은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같다.

곪은 상처라서 가끔씩 들쑤시고 일어나

밤잠을 설치게도 하고, 정신을 은화처럼 맑게도 하는 것이리라.

 

말없이 추억은 내 앞에다. 슬프고 기뻤던 지난 시절들을 풀어놓고,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 추억 앞에서

머리도 빚지 않은 민낯을 드러내놓고, 이런 저런 회상에 잠기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서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추억들이

한 오리 바람으로 다가왔다가 금세 사라져 가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그 추억들을 투아레그족이 부른 노래처럼

되새김질하듯 아주 천천히 회상할 수는 없을까?

 

네 냄새가 제일 좋아

어떤 비누보다도 향기롭지.

네 냄새를 맡을 때마다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해,

흰 모래밭 같은 너에 대한 추억은

아무도 흩어버릴 수 없지,

바람이 모든 걸 지워버려도

네 자취는 언제나 새롭지,“

 

추억이 새롭고 향기롭다.

그럴 수도 있을까?

 

추억은 사랑의 가장 확실한 토대다.”라고

<푸른 꽃>의 저자인 노발리스는 말하고 있는데,

당신은 어떤 추억 속에 그 사랑들을 간직하고 있는가?

 

2018216일 금요일 무술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