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밤 너머론 봄비 주절주절 내리는데,

산중산담 2018. 4. 27. 13:33


밤 너머론 봄비 주절주절 내리는데,


 

서울에서 국토를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둔 차창에 주룩주룩 봄비가 흘러 내렸다.

이 비 그치면 남녘에선 꽃 소식이 폭죽이 연달아 터지듯 달려올 테지,

차는 봄 비 사이를 뚫고서 질주하고,

터미널에서 비닐우산을 사들고 돌아오자

방안은 내가 떠난 그대로 여기저기 책들이 펼쳐져 있다.

방안까지 봄비가 내리는 걸까, 후두 둑, 후두 둑,

봄비가 자장가처럼 내리는 소리 들리고,

어디선가 속삭임처럼 들리는 시 한 편,

 

밤 너머론 봄비 주절주절 내리는데,

봄기운도 다한 듯

비단 이불 덮고도 새벽녘 한기 견디기 어렵구려.

꿈속에선 이 몸이 포로인 것도 잊고

잠시나마 환락을 좇았다네.“

 

중국 남당의 마지막 황제로 975년에

나라가 망한 뒤 송나라의 수도였던 변경汴京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독살당한 이욱李煜우미인(虞美人)이라는 시다.

그는 나라의 흥망에는 관계치 않고 시를 지으면서 그 시 구절을 놓고

고민했다고 하는데, 서법과 회화에 뛰어났고,

음률에 정통했으며 시문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다.

 

봄의 꽃 가을 달 언제였던가,

잊지 못할 옛 일 많고 많아라.

초라한 누각에 간밤에 또 동풍이 불고

밝은 달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못 견디어라.

아리따운 난간 옥돌 층계는 그대로 있겠거늘

오로지 이 몸만 늙었구나.

묻나니 그대 수심 그 얼마인고?

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봄의 강물 같구나!

春花秋月何時了,

往事知多少.

小樓昨夜又東風,

故國不堪回首月明中.

雕欄玉砌應猶在,

只是朱顔改.

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이욱이 지은 가을에 관한 시 한 편이다.

 

지난 시절 돌아다보니, 옛 시절은 추억 속에나 있고,

몸은 이미 늙고 돌아 갈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회한만 몰아온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운명인 걸 어찌하랴.

그렇다.

몸을 옷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을 자기의 몸에 맞추어

입어야 하는 것과 같이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그는 황제 노릇을 잘 하지 못해 나라를 망친 황제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산 사람이기는 하다.

황제 노릇을 아무리 잘했을 지라도 수많은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기억 되고 있을 그가 시인으로서 오늘날까지

그 명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 길,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능률도 오르고, 사는 것이 재미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사는 재미도 없으면서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하다고 여겨질까?

 

봄 비 속을 헤집고 도착하니 열 시 반,

잠시 자다 일어난 새벽에

봄비 소리를 다시 들으며 책장을 펴는 나는 또 누구인가,

 

201838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