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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동상을 전주 정여립로에 세우자.

산중산담 2018. 4. 27. 13:44


정여립 동상을 전주 정여립로에 세우자.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오늘의 시대를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 시대가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열정들이 모여 오늘의 이 시대가 도래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 속에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기축옥사己丑獄死>의 주인공 정여립鄭汝立이며, 그가 제창한 사상이 <대동사상>입니다.

정여립은 전주 남문 밖(현재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서 태어났고, 전해오기는 율곡 이이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서 홍문관 수찬으로 임금과 함께 경연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임금인 선조와 그 당시 동서양당으로 붕당이 된 불합리한 시대상황에 환멸을 느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모악산 자락으로 낙향했습니다.

정여립은 제비산 자락, 지금의 금평저수지 부근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세상. 자유롭게 사는 그 사상을 널리 펴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하였습니다.

 

진안의 죽도와 전주 일대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대동사상을 널리 펴던 중, 전주 부윤 남언경(양명학자)의 요청에 의해 남해 바다로 침략해 온 왜구들을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동계가 더 큰 세력을 확장하기 전, 동서붕당의 와중에서, 정철과 송익필 등 서인들에 의해 158910월에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고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정여립이 황해도 지역과 전라도 지역의 민중들을 모아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 금부도사를 급파했는데, 서인 측에서는 역모가 발각되니 자결했다.’고 하고, 동인 측에서는 단풍놀이 가자고 한 뒤 때려 죽였다.’고 하는 의문사로 인해 정여립 모반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기축옥사己丑獄死>가 기정사실로 굳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의 지식인 1천여 명이 희생되었고, 3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유성룡이 <운암잡록>에서 말한 바대로 조선의 알 토란 같은 지식인 1 천여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기축옥사>입니다.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라고 일컫는 그 사건이 일어난 3년 뒤인 1589년에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패한 혁명도 혁명이라고 한다면, ‘실패한 혁명가도 혁명가가 일 것입니다. 조선 중기, 그 엄혹한 왕조시대에 시대를 앞선 평등, 자유, 대동사상, 대동사회를 염원하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가가 정여립입니다.

하지만 실패한 혁명가인 정여립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은 허균의 <호민론豪民論,민중은 불이나 물 또는 호랑이보다 무섭다>으로 이어졌고,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 ..주 시대에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왕조를 교체한 것>으로 면면이 이어져 근현대사의 출발점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된 것입니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정여립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다. 그러나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여립의 대동사상은 전 세계에서 최초의 공화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현대 영국 정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164812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와 국가를 장악하였습니다. 그 뒤 1949130일 영국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 한 뒤 공화정을 수립했고, 150년 뒤인 1789년과 1794년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여립을 두고 영국의 혁명가인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공화주의자이자, 세계 최초로 공화주의를 주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시대에 대동 정신은 날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정여립로에 정여립 동상을 세워 대동 정신을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할 것입니다.

 

천하는 공공한 물건인데, 어디 일정한 주인이 있는가?”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여립이 대동사상을 주창한 전주는 민주주의의 효시가 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정여립은 여러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넓게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아서 성현의 글을 읽지 않은 것이 없고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다연려실기술에 실린 정여립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은 언변이 출중하여 한번 입을 열면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이 그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비록 그 그릇됨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감히 그와 더불어 쟁변하지 못하였다.”라고 실려 있으며, 정치적으로 입장이 달랐던 서인측도 넓게 보고 잘 기억하여 경전을 관철하였으며, 논의는 격렬하여 거센 바람이 이는 듯 하였다.”고 한다.

 

단재전집에서 신채호는 정죽도(여립)선생은 민중군경(民重君經)을 주장하다가 사형을 입으니……라거나 “400여년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라 하며 정여립을 높이 평가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그를 체포하러 가는 도사都事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여립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편지들을 압수하여 대궐 내에 들이게 하였다. 그래서 무릇 여립과 평소에 친근하게 지내어 편지를 주고받은 자는 다 연루連累를 면치 못하게 되어 사류士類가 죄를 얻게 된 자가 많았다.(중략) 옥사獄事는 덩굴처럼 얽히고 뻗어나서 3년을 지내도 끝장이 나지 않아 죽은 자가 몇 천 명이었다. “ 유성룡의 <운암잡록>

 

정여립이 남긴 유일한 어록은 다음의 몇 줄이다.

사마광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의 촉을 정통으로 보지 않고 위를 정통으로 삼아 기년한 것은 참으로 직필(直筆)이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우가 임금 자리를 서로 전한 것이 성인이 아닌가? 충신은 불사이군이라고 왕촉이 말한 것은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일 뿐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이 말을 풀어 쓴다면,

정여립은 군주 왕위의 세습을 부인했다. 중국의 성인인 요우가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당대의 현자에게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천하의 제위(帝位)가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정여립은 믿었다.

둘째, 정여립은 충군사상을 부인했다. 임금과 신하가 절대적 충성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직적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군신의 주종관계가 무너짐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민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번째,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국가(천하)가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니고 민중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원시적 형태의 국민주권설의 성격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