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그 세 번 째 청량산 청량사에서 안동시 풍산읍 낙동강까지-

산중산담 2018. 4. 27. 13:47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그 세 번 째 청량산 청량사에서 안동시 풍산읍 낙동강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세 번째 여정이 2018427()일에서 29()일까지 실시됩니다.

봉화를 지난 여정이 안동에 접어들고, 못다 걸은 청량산과 애일당과, 퇴계오솔길, 그리고 이육사 생가와 단천 마을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안동댐에 있는 오천문화재단지, 와 안동시내의 문화유산, 그리고 풍산읍까지 이이질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나무들 사이로 깍아 지른 듯한 절벽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그 틈새마다 푸른 소나무들이 암벽들에 뿌리를 내린 채 서 있다. 조선조에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아름다운 청량산을 이렇게 예찬했다.

 

해동 여러 산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또한 주세붕보다 여섯 살이 아래고 이곳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퇴계 이황이 청량산의 내 청량사 가는 길옆에 오산당(吳山堂)’이라는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는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었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그 동안에 풍기군수와 대사성 부제학과 좌찬성이라는 벼슬에 올랐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는 이름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금탑봉 아래 외청량사 웅진전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남아 있고, 자그마한 산신각에 호랑이 그림이 특이했다. 소주 한 잔 준비 못하고 찾아온 무례함을 대신하여 산신각에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리고 산길을 내려오며 주세붕의 청량산 예찬을 생각했다.

 

이 산은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또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청량사에서 마주보이는 건너편의 청량산성은 공민왕 16(1361). 1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오자 노국대장공주를 데리고 이천을 거쳐 이곳에 온 공민왕은 청량산 근처에 솟아오른 축융봉 아래 청량산성을 쌓고 1년 간 숨어 지냈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은 내리막길이다. 그러나 내려간 만큼 또 올라가야 하고 올라간 만큼 내려가는 것이 인생살이가 아닌가. 나는 이 길을 내려가며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천을 하기도 전에 이 일은 안 될 거야하고 포기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길을 가기도 전에 길이 없을 거야 하는 헛수고만 하고 말 거야 하고 중도 포기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길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는 낙엽 쌓인 길을 걸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깨닫는다. 나는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걸어 왔던가.

길이란 무엇인가를 지은 레지스 드브레는 말한다.

발걸음의 문화는 덧없음의 고뇌를 진정시켜준다. 걸어서 하루에 30킬로미터를 갈 때 나는 내 시간을 일 년 단위로 계산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삼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때 나는 내 인생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다.”

그렇다. ‘걸어간 만큼만 나의 길이며 걷지 않는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내가 졌다고 생각될 때에도 나는 길 위에 있었고 내가 이겼다고 생각될 때에도 나는 길 위에 있었다. (...)

 

넓고도 넓은 낙동강을 건너다

 

두 번씩 배낭을 다시 싸고 풀고 한 끝에 든든한 지팡이 하나 만들고 낙동강을 건넌다. 되도록이면 여울을 따라가고 모래를 밟자 미끄러운 자갈보다 모래는 안심하고 딛어도 좋다. 자갈을 밟을 땐 미끄러움을 제거한 뒤 밟고 중요한 것은 지팡이를 제대로 짚자. 두발보다 세발이 왜 필요한 가를 강을 건너면서 안다.

강물은 무릎을 넘고 드디어 팬티 아랫부분까지 적신다. 서두르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강물이 드세게 나를 내밀지라도 한발 한발 조심스레 옮기자 가긴 가는데 왜 그리 낙동강 저편은 멀고도 먼지 온갖 상념들이 다 떠오르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넘어지지 말자 쓰러지지 말자 내가 무너지면 강물은 발원지에서부터 따라 내려온 오랜 친분도 잊은 채 내 온몸을 휩싼 채 흐를 것이다. 나는 결정적으로 헤엄도 못치지 않는가? 건너갈 수 있다. 드디어 강 저쪽에 내 발이 닿고 건너긴 건넜다.(...)

 

강 건너 개목마을은 낙동강이 마을 앞에 이르러 목처럼 잘록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개목(포창)이라 부른다. 백운지 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강길을 따라 내려가면 단사마을에 이른다. 논과 밭의 흙들이 유난히 붉고 단사(丹砂 : )가 많이 나 이름조차 단사라고 지은 이 마을은 옛부터 살기가 좋아 70년대에는 100여 가구가 살았었지만 지금은 50여 가구만 살고 있을 뿐이다.

퇴계 이황이 이 마을의 여덟가지 볼거리 중 하나로 꼽았다는 붉은 흙들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조금 내려가자 병풍바위에 닿는다.

단사-(丹砂峽)이라고 부르는 병풍바위는 단사 동쪽에 있는 벼랑으로서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낙동강이 그 밑을 활처럼 둘러 흘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단사협이라 명명하였다. 남쪽에 왕모성(王母城) 갈선대(葛仙臺), 고세대(高世臺)가 있는데 단사팔경(丹砂八景)붉은 흙과 함께 공민왕의 어머니가 피신했다는 왕모산성’, 마을 앞의 병풍바위 한쪽에 칼처럼 생긴 칼산대’, 용이 승천했다는 용연’, 병풍바위 아래 있는 너럭바위 추레암’, 과실이 많이 열린다는 목실골’, 개목 그리고 낙동강의 굵은 모래등이다. 이 단사팔경은 도산십경을 더해 도산십팔경으로도 불린다.(...)

 

도산서원 앞을 낙동강이 흐르고

아랫 토계에 있는 산성산에 퇴계 이황의 무덤이 있다. 나는 아랫토계 마을에 들러 잠시 쉬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옛날에는 낙동강물에다 나물을 씻어먹고 낙동강물을 그대로 떠다 먹었어요 강가에 조개도 많았고 돌아다니다 보면 빙어들과 피라미들이 정갱이를 간지럽혔어요...... 앞으로 낙동강 변에다 농사를 못짓게 한다는데 농사를 못 짓게 헐라면 먹고 살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할 게 아니에요강을 따라 걷다보면 왜 이렇듯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지 가슴만 답답하다.

나는 웃토계에서 도산서당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퇴계 탄신 오백주년을 맞아 포장도로가 되고있는 것을 보지 않고 아랫 토계에서 강을 따라 도산서원으로 향한다. 하천부지에는 수확을 끝낸 옥수수 밭과 무우 밭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여기서부터 낙동강은 그 본연의 소리를 잃고 안동호로 접어든다. 여울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강물은 콸콸콸 소리를 내며 들어가고 물이 빠질대로 빠진 강변에는 한삼 넝쿨과 여러 풀들이 우거질대로 우거져 있다.

며칠 전 쯤 누군가 지나간 듯한 길을 천천히 헤치고 가지만 길없는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발 한발 걷다보니 나무숲 무성한 도산서원에 이른다. 도산서원의 전신은 도산서당이었다(...)

 

. 임청각에서 낙동강 물을 바라보다

탑에서 조금 내려가면 기와지붕들이 연달아 있는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임청각이다.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이 안동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임청각(臨淸閣)은 중종 10년에 형조좌랑을 지낸 이낙(李烙)이 짓고, 퇴계 이황이 약관(若冠)에 임청각 액자를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가 글을 남긴 아름다운 집이다. 아흔아홉칸 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이 집은 중앙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50여칸만 남아있는데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 별당 형식의 정자건물이다. 보물 제 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임청각에 올라서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동쪽의 작은 연못에는 수련이 피어있는 이 집을 한국의 빼어난 건축가 중의 한사람이었던 김수근은 인간적인 칫수를 반영하여 지은 집이다라고 설명했을 정도로 겸허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의 개념을 연출해 지은 집이다.(...)

 

법흥교를 지나며 낙동강은 여울져 흐르고 낙동강은 이?殆【? 임하댐을 거쳐온 반변천을 받아들인다. 임하댐은 198412월에 착공하여 19925월에 준공되었으며 높이는 73m에 길이는 515m에 이른다. 유역면적은 1.361이고 저수면적은 28.7이며 저수용량은 595백만 톤이다. 계획 총수위는 164.70m이고 발전능력은 25X 2대이고 홍수조절은 8천만 톤이다. 용수공급은 493백만 톤이고 투자비는 2,980억원이 들었으며 그때 수몰된 지역은 126개면 35개리의 1744세대 9139명이었다.

한편 반변천(半邊川)은 영양군 일원면 일월산(日月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일월면 도계동에 이르른다. 이곳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오장군 삼달(吳將軍三達)이 강화(講和)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자살하였다 하여 장군천이라 부른다. 영양면 대천동에 이르러 동쪽에서 오는 화천(化川)을 합하여 한천 또는 대천이 되고, 입암면 연당동 석문(石門)에 이르러 북쪽에서 오는 청기천(靑杞川)을 합하게 된다. 남이(南怡)장군이 이곳에서 아룡(阿龍), 자룡(子龍)이 형제를 토멸했다하여 남이포라 부른다. 강은 그곳에서 방전동에 이르러 남쪽에서 오는 화매천(花梅川)을 합하여 서쪽으로 꺾이어 청송군 진보면을 거치고, 안동군 임하면 망천동에 이르고, 북쪽에서 오는 임동천(臨東川)을 합하며, 신덕동에 이른다. 그 뒤 남쪽에서 오는 길안천을 합하고, 계속 서쪽으로 흘러 안동시 용상동에서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낙동강 변에서 나고 자란 사람중에 김성일이 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에서 태어난 학봉 김성일金誠一은 서애 유성룡, 조목과 함께 퇴계 이황의 삼대 제자로 손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