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걷기 학교, 청송과 영양의 <외씨버선 길>을 걷는다.
5월의 연휴인 5일에서 7일까지 이박 3일간 청송과 영양 일대에 있는 외씨 버선길과 그 아름다운 영덕 블루로드 길을 걷습니다. 경북 지방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영양과 청송의 문화유산과 주왕산 일대, 그리고 동해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블루로드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은 봄 속에서 봄 속으로 가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연록색의 봄물이 오르는 주산지와 청송의 아름다운 절 대전사와 주왕산 기슭을 걷게 될 것입니다.
“태백산 밑 네 산골마을은 동쪽으로 “영양군과 진보 두 고을은 풍속이 대략 같고 진보에서 동쪽으로 읍령을 넘으면 곧 영해(지금의 영덕)지역인데, 북쪽은 강원도 평해와 경계가 맞닿아 있다.”
택리지에 실려 있는 청송군 진보면은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현이었는데, 현재는 청송군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되어 있다., 진보현의 객관 북쪽에 있던 압각대鴨脚臺를 두고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다행히도 동헌 앞에 압각대가 있어 과객을 받으므로 갔다가는 돌아오네. 강남에서 어느 누구 장대류를 부르는고, 농상에는 아무도 역사매를 기대지 않네. 붉은 나무는 가까워 걸음이 길어질 듯하고, 푸른 산은 눈앞에 우뚝함이 쌓여있네. 늙은이가 힘써 일했지만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세월은 유유히 술잔에 부쳤거늘.”이러한 시가 남겨진 진보현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있던 조선시대의 현으로 본래는 신라의 칠파화현漆巴火縣이었다.
청송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주왕산(周王山)과 청송보호감호소가 자리 잡은 곳이다.
홍여방(洪汝方)의 <찬경루기讚慶樓記>에 “선덕宣德 기유년 중춘仲春에 나는 바다를 따라 동에서 북으로 가다가 진보眞寶에 이르러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수십 리를 가는 동안 점점 산세山勢는 기복起伏이 있어서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으며, 냇물은 서리고 돌아서 마치 흘러가려 하다가 다시 나오는 것 같았다. 소나무 잣나무는 울울창창하고, 연기와 노을은 어둠침침하게 잠겨 있어서 맑고 그윽한 한 동학洞壑이 의젓한 선경仙境인 듯 한 것은 곧 청송이었다 (중략) 행례行禮를 마친 뒤에 남루南樓에 올랐더니 원체가 백성들이 순박하고 풍속이 후하여 온 종일 고소장告訴狀을 내는 자가 없었다.” 라고 실려 있는 청송군 파천면 덕천 1동에 심부자의 집이 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사의 7대 손인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1880년 무렵에 지은 이 집은 ‘송소고택’이라는 명칭보다 ‘심부자집’이라고 불리고 있다. 9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청송 심부자의 집은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낸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경상도의 이름난 부자이다. 이 집이 의성에서 이곳 청송으로 이사 올 때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어느 날 도적들이 이 집에 들어와 집안사람들을 위협하자 이 댁 안방마님이 나와서 “사람들의 목숨은 다치지 말라”면서 곳간문을 활짝 열어주고 마음껏 가져가게 하였다. 도적들이 욕심껏 가져가고 남은 재산으로 지은 집이 바로 이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떵떵거리던 청송 심부자 집도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단행한 뒤로는 집과 함께 그 부자집이라는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가 지금은 한옥생활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파천면 신기리 가람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인 감남골에는 퇴계 이황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이퇴계의 5대조의 묘로 금계포란형의 명당으로 손꼽히는데 이곳에 퇴계 이황의 선대 조상들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퇴계 이황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었을 때 하루는 원님이 감남골의 지세를 살펴보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달걀을 가지고 가서 이곳에 파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원님을 속이 곯은 달걀을 묻고 자시가 되어 가 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므로, 닭의 소리가 안 들린다고 전하니, 원님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뒤 원님은 서울로 큰 벼슬을 얻어 떠낫는데, 아전은 전의 일이 아무래도 수상하여, 밤중에 몰래 새 달걀을 가지고 가서, 그곳에 파묻고 기다리니, 닭 우는 소리가 들려서 파보니, 병아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명당자리인 줄 알고 있다가, 자기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이곳에 묻으니, 시체가 땅밖으로 튀어나오므로, 다시 깊이 파고 묻었는데, 또 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그 때의 원님을 찾아 뵙고 지난날의 자기가 지은 죄의 용서를 빌고,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원님은 자기가 그때 산소자리를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말하기를, “그곳은 큰 벼슬을 지낸 사람만이 묻힐 곳이라.”하며, 헌 관복 한 벌을 내주며 “시체에 이 관복을 입혀서 장사지내라.”고 하매 그대로 하였더니, 6대 만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고 한다.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듯한 여기가 내 고향
맑은 냇물과 붉은 절벽이 금당에 비치네.
라고 이곳 진보를 노래한 사람이 이황이었고,
조선 초기의 대학자인 김종직은 이곳 청송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 봄을 구르는 쑥처럼 떠다니는 이 몸은 외롭구나. 이미 좋은 계절季節에 꾀하던 일은 시기를 잃었음을 깨닫는다. 장막帳幕안의 잣나무 향香이 타서 다하고자 하는데, 일만 산 깊은 곳에 청부靑鳧가 자고 있다네.”
조지훈의 고향 영양
?영양읍지?에 “이곳이 교통이 불편하고 흉년이 잦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을 때가 많았으나 조선 숙종 때 현이 부활된 뒤에 이웃인 안동과 예안의 유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글을 숭상하게 되었고 주민의 성질이 착하면서도 인내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영양에는 “당대에 타관에서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으나 당대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말이 돌기도 했다.
봉화군 경계에는 일월산과 오십봉, 주산․수산 등의 높은 산들이 펼쳐져 있어 영양에서 울진으로 가려면 여러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 중 백암산(白岩山)을 넘어 동해로 가는 고개 이름이 울릿재였다. 봄․가을마다 곡식을 관청에 바치려고 넘어갈 때 고갯길에 도사리고 있던 호랑이와 도둑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연유로 울면서 넘어갔기 때문에 울릿재 또는 읍령(泣嶺)으로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해도호부편 산천’조에 “서읍령은 부의 동쪽 40리에 있어서 온 고을에 전송하고 영접하는 곳이 되어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크고 작은 사신의 행차가 만약 처음으로 재를 넘으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다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서 영양읍 서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예우름재는 행곡령 또는 여림현으로 높이 579미터의 고개이다. 조선시대 청기고을 사람들이 영해부로 부역하러 다닐 때 너무 험준해서 넘어 다니기 어려우므로 그 괴로움을 한탄하며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조지훈(趙芝薰)의 옛집이 있다.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호가 지훈인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낸 조지훈은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다. 그때 번역했던 책들이〈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8·15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 조지훈은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다.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조지훈은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나이 48세였는데 그가 지은 <지조론志操論>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숨 쉬고 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
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
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
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중략)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
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
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
존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
켜지지 않는다. (중략)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
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
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
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
절을 변절이라 한다. (중략)
한편 이곳 영양군에서 태어난 소설가가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등의 소설을 지은 이문열(李文烈)이다.
그가 태어나 태를 묻은 영양에서 영덕군 창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창수령인데, 이문열은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창수령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창수령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청송과 영양 일대의 외씨버선 길과 동해의 아름다운 길 블루로드를 걷게 될 2018년 <봄 걷기 학교>에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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