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신록이 우거진 계절 5월에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걷는다.

산중산담 2018. 4. 27. 13:54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 열닷새 길이었고,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 열엿새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 아이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 아리랑 속에 나오는 칠천만 우리민족의 노래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택리지>지은 이중환은 ‘새재’와 ‘죽령’만을 나라의 큰 고개라 하고 나머지는 작은 고개라 했다. 그것은 고개의 높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교통량이라든가 도로의 중요성까지 감안하여 붙인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고개임은 사실이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한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붙여졌다고도 하고, 억새풀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신라와 고려시대 나라의 대동맥이었던 하늘재 즉 계립령을 대신하여 문경새재를 개척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재발굴조사사업’을 실시한 결과에 의하면 이 고갯길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뚫려 있었고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거나 묵어가기도 했던 객관, 즉 원(院)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신라시대 때부터 자연히 이루어진 좁은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령 제일 관문은 주흘관. 조령제일관문으로 불리고 있는데,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문루가 있으며, 영남제일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동쪽에 주흘신사가 있다. 이 사당은 소사小祠로 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다. .

문경새재는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에 제대로 방어된 적이 없었다. 1589년에 중봉 조헌이 도끼를 옆에 끼고 왜적 방비책으로 영남지방과 문경새재에 경계를 더할 것을 상소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선산과 상주를 함락시키고 문경으로 진격해왔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뒤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를 정찰한 뒤에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충주에 있는 남한강가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던 왜군은 새재를 넘으면서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된 왜군은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왜군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그 때 신립 장군이 새재에서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은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위하로 불러들여 조령 지키는 일을 버리게 되었다. 적이 조령 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접근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이제독(명나라의 이여송)이 조령을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적에게 넘기다니, 신총병(申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내가 이듬해인 계사년에 남쪽의 진중을 왕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보니, 관문을 설치하고 양변을 따라 복병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군읍에 씻은 듯이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렸던 신립은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결국 참패하였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남한강으로 투신 자결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남사람들의 길목이었던 새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25년이었다. 문경읍 각서리에서 해발 548m의 이화령을 넘어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가는 산길에 신작로와 터널을 뚫은 것이다. 곧 바로 역사와 전설의 고개 새재는 버려진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퇴락했던 관문들을 새로 복원하면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TV의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고 그 바람에 <새재노래>역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갔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때,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새재 50리 길에 우거졌던 박달나무도, 한국전쟁 전까지 이 일대 주민들이 만들어 팔았다는 방망이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갑천(串岬遷)은 용연 동쪽에 있고 토천(兎遷)이라고도 부른다. 돌을 파서 사다리 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7리에 이른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쳐 와서 이곳에 길이 없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벼랑에 돌로 쌓은 성터가 있는데 옛날에 지키던 고모산성이다”는 기록이 있다.

 

“어허야아! 위태롭구나, 높을시고, 촉나라 길은 어렵다.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도 어렵다.(중략)하늘에 닿은 사다리와 돌로 쌓은 잔도棧道가 차츰 놓였다.

위로는 햇님의 수레도 돌아가는 봉우리가 있고, 아래로는 세찬 물결이 거꾸로 흐르는 소용돌이가 있다. 노란 두루미의 날개도도 지나가지 못하고, 원숭이의 재주로도 기어오르기가 어렵다.(중략) 한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꿰뚫지 못한다."라고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의 절창 <촉도난蜀道難>에 실린 것 같은 곳이 관갑천잔도다. 깎아지른 벼랑길에 좁게 만즐어진 길을 걷노라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골이 오싹하다.

(2009년 10월 26일)

자연 암벽이 갈라져 고갯마루를 이룬 고개인 이 관갑천 잔도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이르는데, 토끼벼랑(兎還)이라고도 한다. 돌을 깨고 뚫어서 뜬 사다리처럼 길을 내었다. 굽어 돌고 구불거리는 길이 거의 6~리나 되는데, 이어져 오는 전설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려가므로 드디어 길을 열고 지나갔으므로 토끼벼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북쪽 끊어진 봉우리에 돌로 쌓은 성의 남은 터가 있는데, 옛날에 막아 지키던 곳이다.”

 

이 잔도에서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밟아서 반질반질한 바위로 된 고개를 넘자 영강의 물길이 그림처럼 휘어 돌고, 고모산성이 바로 지척이다.

신정일의 <영남대로> 중에서

 

문경의 아름다운 정자가 주암정이다. 주암정舟巖亭은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44-4번지에 있는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종(顯宗) 때의 생원인 주암 채익하(舟巖 蔡翊夏)가 세웠다. 마을의 동남쪽을 흐르는 강변에 배의 형상을 한 바위 위에 짓고 이름을 주암(舟巖)이라 하였다.

채익하(1633~1676)는 인천채씨(仁川蔡氏)이며 조선 전기의 문신인 나재 채수(懶齋 蔡壽)의 6세손이다. 주암의 9대손이 쓴 주암정기(舟巖亭記)가 전한다.

겨울의 한 복판에 나라 안에서 제을 아름다운 길 중의 한 곳인 문경새재와 곤갑천 잔도,와 고모성, 그리고 문경의 명물인 주암정을 답사할 사람들은 참여하십시오.

 

 

 

신록이 우거진 계절 5월에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걷는다.

 

 

신록이 무성한 2018519일 토요일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걷고 싶어 하는 길이자. 아름다워서 아껴 가며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걷습니다. 우리나라 옛길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익히기 위해 마련 된 이번 도보답사는

숲이 무성한 문경재재를 걸으며 이런저런 많은 상념에 잠기면서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 열닷새 길이었고,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 열엿새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 아이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진도 아리랑 속에 나오는 칠천만 우리민족의 노래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택리지>지은 이중환은 새재죽령만을 나라의 큰 고개라 하고 나머지는 작은 고개라 했다. 그것은 고개의 높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교통량이라든가 도로의 중요성까지 감안하여 붙인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고개임은 사실이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한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붙여졌다고도 하고, 억새풀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신라와 고려시대 나라의 대동맥이었던 하늘재 즉 계립령을 대신하여 문경새재를 개척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재발굴조사사업을 실시한 결과에 의하면 이 고갯길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뚫려 있었고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거나 묵어가기도 했던 객관, 즉 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신라시대 때부터 자연히 이루어진 좁은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령 제일 관문은 주흘관. 조령제일관문으로 불리고 있는데,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문루가 있으며, 영남제일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동쪽에 주흘신사가 있다. 이 사당은 소사小祠로 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과 축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다. .

문경새재는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에 제대로 방어된 적이 없었다. 1589년에 중봉 조헌이 도끼를 옆에 끼고 왜적 방비책으로 영남지방과 문경새재에 경계를 더할 것을 상소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592414,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선산과 상주를 함락시키고 문경으로 진격해왔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뒤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를 정찰한 뒤에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충주에 있는 남한강가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던 왜군은 새재를 넘으면서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된 왜군은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왜군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그 때 신립 장군이 새재에서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은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위하로 불러들여 조령 지키는 일을 버리게 되었다. 적이 조령 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접근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이제독(명나라의 이여송)이 조령을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적에게 넘기다니, 신총병(申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내가 이듬해인 계사년에 남쪽의 진중을 왕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보니, 관문을 설치하고 양변을 따라 복병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군읍에 씻은 듯이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렸던 신립은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결국 참패하였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남한강으로 투신 자결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남사람들의 길목이었던 새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25년이었다. 문경읍 각서리에서 해발 548m의 이화령을 넘어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가는 산길에 신작로와 터널을 뚫은 것이다. 곧 바로 역사와 전설의 고개 새재는 버려진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퇴락했던 관문들을 새로 복원하면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TV의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고 그 바람에 <새재노래>역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갔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때,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새재 50리 길에 우거졌던 박달나무도, 한국전쟁 전까지 이 일대 주민들이 만들어 팔았다는 방망이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르고 싶은 이 길이 곧 계립령 하늘재다.

이 지역 사람들이 한티, 천티,마골령이라가도 부르는 계립령 즉 하늘재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8대 임금인 아달라 왕 3년인 156년에 개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립령鷄立嶺은 마골점 혹은 마목현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껍질 벗긴 삼대를 겨릅(사투리로는 지릅)이라고 하니,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음을 따면 계립(鷄立)이 되고 뜻을 따면 마골(麻骨) 또는 마목(痲木)이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2년 뒤에 개척된 죽령과 더불어 오랫동안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개척되었어도 조선시대까지 주요 교통로 활용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화령과 죽령에 터널이 뚫리면서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이 고개는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새재를 떳떳이 통과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나 보부상들, 그리고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사람들이 넘는 눈물고개였다. 소설가 김주영은 객주(客主)에서 문경읍에서 여주목 고개를 올라서서 대의산 자락을 오른쪽으로 끼고 여우목을 지나 중평리 계곡을 거쳐 포암산 중턱인 하늘재를 넘어 수안보에 이르는 험로가 바로 이곳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면서 충청도 땅에서 경상도 땅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길은 포장도로다. 이곳 관음리 일대에는 관음리마애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 136호인 문경관음리석불입상을 비롯한 여러 점의 문화유산들과 함께 아름다운 옛 지명들이 남아 있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