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그 네 번째
태백의 황지에서 부산 다대포까지 <낙동강 천 삼백리 길>을 걷다.
-그 네 번 째 안동시 풍산읍에서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까지-
낙동강 천 삼 백리 네 번째 여정이 2018년 5월 25(금)일에서 27(일)일까지 2박 3일간 실시됩니다.
오월 신록이 푸르름으로 빛나는 낙동강 변, 풍산읍에서 예천의 삼강나루까지 걸으면서 낙동강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예정입니다.
“마애리 강 건너는 마치 동강의 명물 뼝대처럼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고 여정은 하거리에 이른다. 풍산음내 아래쪽에 있으므로 아릇마 또는 하리라 부른 이 마을에는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다리를 건너 제방뚝에 올라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산 들판은 넓고도 노랗다. 저 풍산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인 안도현은 ‘낙동강’이라는 시에서 낙동강을 이렇게 노래했다.
낙동강
안도현
저?개?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강은
눈 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병산서원에서의 하룻밤
이제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나는 피로한 몸을 짐 부리듯 쉬어놓고 쉬어야 할 것이다. 달디 단 꿀물 같은 대추 몇 알을 길가에서 따먹으며 병산서원에 도착하자 유시석씨와 마을 사람 몇이서 소주를 나누고 있었다. 슈퍼집 아주머니가 금세 쪄낸 옥수수를 한바가지 가득 내오고 그 옥수수를 나누어 먹은 후 병산서원을 관리하는 고지기가 사는 고직사로 들어간다. 만대루에 올라서서 어둠 내린 낙동강을 보고도 싶지만 "고향 그리운 사람 행여 높은 곳에 오르지 말라“고 노래했던 정지상의 싯구처럼 문득 그리운 사람들 떠오를까 그만둔다. 하루 종일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 하도록 따라 걸은 내가 오늘은 병산서원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로구나. 대문 빗장을 열고 들어가 보일러를 켜준 뒤 적적할 것 같다며 집 앞에 전등까지 켜주고 유시석 씨는 돌아간다. 불이 켜있다고 적적한 마음이 사라질까? 불을 끈 후 하늘을 바라보자 하늘에는 벌써 눈썹 같은 초승달이 떠있다. 나는 내 집처럼 대문에 빗장을 걸고 들어와 자리를 펴고 눕는다. 방은 따뜻하다. 다리는 이제 옮기기도 힘들게 너무 아프고 그래 오늘 나는 너무 많이 걸었다.
병산서원까지 꼭 도착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오후동안에 31km를 걸었다. 그래서 이렇게 따뜻한 방에 누워있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나는 병산서원을 오가며 언제쯤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갔으면 좋겠다는 꿈을 얼마나 꾸었던가. 그러나 나는 시간에 쫓겨 만대루 기둥에 기대어 잠시 쉬지도 못하고 떠났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러한 인연이 깊고도 깊어 오늘 이토록 따뜻하고 편안한 이 방에 누워 있지 않은가. 아픈 다리 아픈 등허리 때문에 편한 잠이 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푹 자고 떠나리라.(...)
만대루에 올라서서 낙동강을 굽어보다
병산서원 만대루 위에는 “마루를 올라갈 때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시오”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앞으로는 “마루에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을 세울 예정이란다. 조금만 관리가 소홀하면 마루에 신발 벗고 올라가는 것은 다반사고 그냥 올라가서 음식을 먹지 않나 잠을 자지 않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단다. 몇 사람의 실수 아닌 잘못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만대루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자연을 내 몸처럼 문화재를 내 것처럼 생각하고 실천할 수는 없을까?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으나 갈수록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림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결속을 다졌고 세력을 키운 뒤 중앙 정계로 진출할 기반을 다졌던 곳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유림의 공의로 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면서 설립되었다.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岳書堂)으로 풍산 유씨(柳氏)의 교육기관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유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29년에 유진(柳袗)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863년(철종 14)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성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입교당(立敎堂)?신문(神門)?전사청(典祀廳)?장판각(藏板閣)?동재(東齋)?서재(西齋)?만대루(?對樓)?복례문(復禮門)?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7시 40분 아침 병산서원을 두고 나는 떠난다. 몇 년 전 안동대의 임재해 선생과 안도현 시인 그리고 90여명의 사람들이 한번 넘었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는 유시석씨의 말에 “한번 가보지 않은 길도 헤쳐서 왔는데 설마 못 갈까요” 갈 수 있을 것이다. 밤새워 내린 이슬을 풀들은 흠뻑 머금었고 사과밭이 시작되는 산비탈에서 하회로 가는 산길은 시작된다. 어쩌다 사람이 지나는 이길, 수풀 우거진 이 길에도 패랭이꽃과 구절초꽃, 쑥부쟁이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피어있고 강 건너 마을의 아침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 없다. 그렇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가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미 아침 이슬에 신발에서부터 바지까지 흠뻑 젖었고 사잇길을 지나자 옛 시절에 닦아둔 신작로 길이 나타난다. 칡넝쿨 우거진 길옆의 산초나무에 새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고갯마루를 넘어서며 바라본 낙동강은 아침햇살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내려가는 산길에는 오방떡 같이 풍성한 버섯이 피어있고 숲길을 벗어나자 누렇게 익어 가는 황금들판 끝으로 하회마을이 나타나며 멀리 무용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 전통적 가옥군의 존재와 영남의 명기(名基)라는 풍수적 경관과 아울러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현대공업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전통적 경관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존?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山 柳氏) 동족마을이며,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명당자리라고 하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풍산 유씨가 집단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許氏)?안씨(安氏) 등이 유력한 씨족으로 살아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1635년(인조 13)의 <동원록 洞員錄>에도 삼성(三姓)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미 유씨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그 이전에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과 같은 유씨의 동족기반은 중흥조 유운룡?유성룡 형제시대에 이룩된 것이다. (...)
낙동강변에 늘어진 왕버들과, 내버들 그리고 꽃 버드나무는 저리도 푸르고 구담교를 지나며 어디로 갈 것인가 확신이 안선다.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할 수 없지. 강을 건너지 않기로 나 혼자에게 다짐한다. 어제 병산서원에서 남겨둔 옥수수를 마저 먹고 남은건 오직 박하사탕 한 봉지뿐이다. 가는 길에 식당이나 슈퍼가 안 나타난다면 나는 꼼짝없이 한끼를 굶은 채 걸어야 하는데 지도에 보면 마땅한 데가 없다. 내 마음 속에서 자라나는 근심은 아랑곳 없이 제방뚝에 갇힌채 흐르는 낙동강은 그래도 드넓다.(...)
이곳 배룡에서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문정자라는 정자 이름을 딴 문정자나루였고 반룡에서 풍양면 청각으로 돌아가는 모롱이가 문정자모랭이이다. 그렇다. 예천은 물맛이 좋아서 예천이었고 길손에 대한 인심도 유별나게 좋았던 고장이다. 열 대여섯 살 먹은 남자들은 누구나 가락을 아는 한량이 많았던 고장이고 천석꾼 만석꾼이 많았던 예천군 용궁면 일대는 인심이 좋아서 서울 못지 않게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 반서울이라고 알려졌었다. 드디어 나는 의성을 지나 예천에 접어든 것이다.
풍양과 지보의 이름을 따서 풍지교라고 만들었던 옛날 풍지교는 낡고도 낡아 사람들만 다니고 새로 만든 지인교에는 자동차들은 쌩쌩거리고 지나간다. 나는 나무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제방둑에 앉아 지도를 본다. 길이 마땅치 않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고 사람을 만나야 길을 묻지 물어볼 사람이 없어 지레 짐작으로 나는 저 제방뚝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나는 길 건너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제방뚝의 잔디 위에 누워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다. 다시 길은 이어지고 저 산을 돌아 나는 벌실 지나 삼강나루까지 닿을 수 있을까?(...)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
삼강리(三江里)는 본래 용궁군 남산면(南上面)의 지역으로서 낙동강, 내성천, 금천(錦川)의 세 강이 마을 앞에서 몸을 섞기 때문에 삼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삼강리라 하여 예천군 풍양면에 편입되었다.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예천의 물줄기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난다. 안동댐에서 흘러내린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이 북행하는 길에 상주 쪽으로 건너던 큰 길목이었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인 온갖 공물과 화물이 배에 실려올라와 바리짐으로 바뀌고 다시 노새의 등이나 수레에 실려 문경새재를 넘어갔던 물길의 종착역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로 연결된다.
원래 오백 미터가 넘었다던 삼강리의 강폭은 안동댐이 건설된 뒤부터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수량이 줄자 여름철의 별미였고 오뉴월이면 오이 냄새가 나던 은어가 사라졌고, 그냥 마셔도 되던 맑은 강물이 오염되어 멀리 나가 식수를 구해야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마다 이 지방을 덮쳐 피해를 주던 낙동강의 범람이 잡혀 큰 덕을 보기도 했다.
세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몸을 섞는 백포나루엔 나?紫兀? 사라지고 다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현장감독의 말에 의하면 이 다리는 2년여의 세월이 더 지나야 개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중장비 소리가 시끄럽지만, 낙동강의 물빛은 티없이 맑다. 옛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소금배들이 이곳 백포나루에서 물물교환을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흐릿하게 천천히 흐를 뿐이다. (...)
삼강나루에는 우리시대의 마지막 주모인 유옥연 주모가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자리에 삼강주막이 들어서 사람들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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