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사월초파일 삼사기행, 부안 개암사, 내소사, 고창 선운사를 가다.
2018년 사월 초파일 삼사기행을 5월 22일 화요일 전라도 바닷가의 절 부안의 개암사와 내소사, 그리고 고창의 선운사를 답사합니다.
아릅답기로 소문난 세 곳의 절을 답사하며 우리나라 사찰의 아름다움과 서해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開암寺)지는 변한의 왕궁 터였다고 전해지는데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 문왕은 우禹와 진陳 두 장수를 보내 감독하게 하였으며, 좌우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지은 후 동쪽의 것은 묘암, 서쪽의 것은 개암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백제 무왕 35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짓고 개암사와 묘암사로 고쳐 불렀고, 통일 신라 문무왕 때 원효와 의상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원감국사가 중창하였고, 조?? 태종 때 선탄선사가 중수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효종 9년에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울금산성을 뒷 배경으로 지어진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정면3칸 측면3칸의 팔각지붕 다포식 건물인 대웅보전의 닫집 안에 아홉 마리의 용이 뒤엉켜 물을 토해내는 모습의 목조각이 있고 대웅보전 현판위에는 두 마리의 도깨비 얼굴이 붙어있다. 특히 우금암遇金岩이라고도 부르는 울금바위에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방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는 베틀굴 또는 복신이 병이라 칭하고 나오지 않았던 굴이라고 하여 복신굴이라고도 불린다.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의 장군이었던 복신과 도침이 의자왕의 넷째 아들 풍豊 왕을 불러들여 백제 부흥운동을 벌렸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의 내분으로 백제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이 663년 7월에 주류성을 공격해오자 지원하러 왔던 일본군이 신라 수군의 연화계連火計에 의해 패망하였고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패잔병들을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자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써 다했다. 고향 땅을 어찌 다시 밟으리오.”라는 뼈아픈 탄식을 남긴 채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유민이었던 경상도 문경사람 견훤이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전라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지만 결국 역사의 뒤틀림으로 패망하고 말았으니.....(...)
변산에 내소사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나라 안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전나무길을 800미터쯤 걸어가면 그림처럼 나타나는 내소사는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자리 잡은 절로 백제 무왕34년(633) 혜구(惠丘)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대(大)소래사’와 ‘소(小)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라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11)에 청민선사가 중건하였고, 1902년 관해가 중창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 절을 찾아와서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지만 내놓을 만한 근거는 없다. 내소사는 선계사(仙谿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지만 다른 절들은 전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내소사만 남아 있다.
보물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소사고려동종은 1222년(고종9) 변산의 청림사에서 만든 종으로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1857년(철종4) 내소사로 옮겼다. 높이가 1.3미터에 직경 67센티미터인 전형적인 고려후기 작품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利益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담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幸浩)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 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광해군 6년(1614) 월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 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삼천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다는 선운사
종루를 겸한 천왕문을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건물이 선운사 만세루이다. 다른 건물을 다 짓고 남은 재료로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만세루는 그런 연유인지 세련되거나 정제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길이 27m에 너비 11.8m인 석조기단 위에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집인 이 만세루는 강당으로 쓰이고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세루 앞에 보물 제 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운사 대웅전이 있다. 광해군 때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 계 맞배지붕인 이 건물은 측면에 공포가 없고 대신 높은기둥 두 개를 세워 중량을 받히도록 하였다.
조선중기의 건축으로 섬세하면서도 장식이 뛰어난 다포구성과 꽃 살 분합문이 화려하며 내부의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대었으며 단청의 백화가 매우 아름답다.
이 절 관음전 안에는 성종 7년(1476)에 만들어져서 선운사가 모두 불에 탄 정유재란 때에도 화를 모면한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 279호인 이 불상은 대좌와 광배는 남아있지 않지만 15세기 경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마치 모자 같은 두건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두건의 좁은 띠가 귀를 덮어 내리고 있다. 이러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도상 적 특징으로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고려 불화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얼굴은 살진 얼굴 가운데에 몰려있지만 생기가 없다. 중년부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목이 짧고 통통한 몸매를 지닌 보살상은 조선시대 지장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불상은 일제 때에 일본인이 훔쳐갔던 것을 1940년에 찾아와 이곳에 모셨다.
또한 이 절에는 성종 7년(1486)에 왕명을 받아 새긴「석씨원류」가 있었지만 1579년에 불에 타 없어졌고 지금 영산전에 보관되고 있는 것은 사명대사 유정이 일본에 갔을 때 한질 가져온 것을 1648년 최서룡과 해운법사 등이 복간하였다.
이절 뒤편에 이 나라에서 가장 소문난 것 중의 하나인 5백여 년 이상 된 동백나무가 삼천여 그루 숲을 이루고 있다. 4월말이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가지 채 뚝뚝 떨어지는 눈물겹도록 가슴 시리고 아린 동백꽃을 볼 수가 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라서 볼 수가 없다. 이 선운사에서 가까운 소요산 자락 질마재 아래 선운리에서 태어난 미당 서정주는 선운산 동백꽃에 대한 시 한 편을 남겼다.
선운사 동구(洞口)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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