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늦은 봄에 떠나는 원주와 여주의 폐사지 기행,

산중산담 2019. 6. 26. 10:40


늦은 봄에 떠나는 원주와 여주의 폐사지 기행,


 

답사의 백미는 폐사지 답사입니다. 옛 시절 화려하고 장엄했던 절터에 우뚝 솟은 탑하나 덜렁 있거나 목 잘린 부처가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거나 깨어진 기왓장만 나뒹굴고 있는 폐사지에 가면 우주의 이치와, 오면 가는 인생을 실감하게 됩니다.

2018년 유월 길 위의 인문학 우리 땅 걷기에서, 원주의 거돈사지와 법천사,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이 살았던 속곡리, 원주의 흥법사지와 욕바위, 그리고 여주의 고달사지와 신륵사를 찾아갈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뜻을 지닌 법천사(法泉寺)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절

신라 성덕왕 24(725)에 창건되어 법고사라고 불리던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 때 수학한 사람들이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있다. 그 뒤의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절이 폐사된 뒤 거대한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절에 쓰였던 돌은 마을 들머리의 느티나무를 둘러싼 축대가 되었거나 민가의 주춧돌 또는 담이 되기도 했으며 논밭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인 교산 허균許筠<원주 법천사기>를 남겼다.

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智觀이라는 승려가 묘암墓菴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로 인하여 기축년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遊興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 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 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洞口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말하기를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가려 낼 수가 없습니다. 하여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에도 폐허가 되었던 법천사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발굴이 시작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현재는 법천사지의 발굴을 위해 민가들을 철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을씨년스런 풍경이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는, 노목을 지나서 좌측으로 꺾어진 산길을 한참 오르면 여러 가지 석물들과 함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절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석불만 남아있는 이 절에서 당대의 제일가는 고승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열반에 들었다. (...)

비신 상면의 가운데에 지광국사현묘탑비라고 쓴 사각 편액이 있으며 편액 양 옆에는 사각의 틀을 만든 후 그 안에다 봉황을 새겨 넣었다.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인물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지광국사의 행적을 적은 이 비문은 당대 명신 정유산이 찬하고 명필 안민후가 썼는데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여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이 비 옆에는 지광국사의 현묘탑이 서있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보기보다 페르시아 풍의 이 부도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오사카에 강제 밀반출 되었다가 8.15 광복 이후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 뜰에 세워졌다. (...).

이능화는조선불교통사에서 원주 지광국사 현묘탑은 정교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가하였는데 경복궁 안에 쓸쓸히 서있는 지광국사 현묘탑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먼 곳에서 법천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신라시대의 절로 폐사지가 된 흥법사 터가 있다. 신라말기에 진공대사眞空大師가 세운 흥법사 興法寺 는 고려 시대 원주(原州) 영봉산(靈鳳山)에 있던 절로 왕사 충담이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부도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7세기 초 원광법사의 부도가 최초로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부도는 전 흥법사 傳 興法寺 의 염거화상탑 廉居和尙塔 844년 이다 9세기에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온 후 부도 조성은 우리 불교계에 유행처럼 번지게 되면서 더욱 많아진다.

조선초기의 문장가인 서거정은 임지로 떠나는 민정閔貞에게 보내는 글에서 흥법사를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치악산 속에 글 읽던 절, 젊을 때 노닐던 지난 때의 일 역력히 생각나네. 법천사의 뜰 아래 에서는 탑에 시를 써 놓았고, 흥법사의 대앞에는 먹으로 비를 탁본하였지. 그때의 행장은 나귀 한 바리에 실을 만한 것도 못 되더니, 지금은 돌아가는 길을 꿈이 먼저 아는구나. 머리가 희어지도록 다시 돌아가려는 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대를 보내는 마당에 멀리 나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구려.”

흥법 북쪽에 조선시대의 창고가 있었던 창촌 마을이 있는데 김제남 신도비를 두고 내려오자 섬강이 보인다.

 

전국의 3대 선원 고달선원

멀리 보이는 북내면 상교리에 남한강변의 이름난 폐사지 고달사가 있다. 도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의 고달사高達寺는 혜목산 아래에 있다. 아늑하게 감싸인 지형이 큰 소쿠리 속에 있는 듯하다. 신라 경덕왕 23(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고달사를 신라시대 창건설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보다는 원종 이전 나말여초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의 절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리었는데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회는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였고 진경대사는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넘긴다.

 

고달사를 중흥시킨 신라 말의 고승이며 고려 초의 선승이었던 원종대사 찬유는 성은 김씨였고 자는 도광, 계림이며 하남에서 용의 아들로(경문왕 9)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상주 공산 삼량사에서 융제선사에게 배웠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서 혜목산의 심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진성여왕 4)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광주 송계선원에 있던 원종은 심회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 서주 투자산의 대동大同에게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 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경명왕 5)에 귀국하여 봉리마에 머물렀고 원감국사 현욱에 이어 진경대사 심회에게 법맥을 이어받게 된다.

심회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3년 동안 머물렀던 원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로 가게 되지만 다시 이곳 혜목산 고달사로 되돌아와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대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을 이룩하였고 혜종과 명종은 가사를 내렸으며 광종은 그를 국사로 책봉하고 증진대사라는 호를 내렸다.

국사의 자리에 오른 원종에게 임금은 은병, 은향로, 수정염주, 법의 들을 내렸으며 고려 왕실의 막대한 지원에 힘 입은 원종대사는 이곳 고달선원을 전국 제일의 사찰로 만들었다.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달선원은 희양원, 도봉원과 함께 전국 3대 선원으로 불렸다.

 

고달사지에는 석물만 남아 있고

현재 발굴중인 고달사터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유물이 보물 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대좌이고, 석불대좌에서 서북쪽으로 보물 6호인 원종대사 승탑의 귀부와 이수가 있다. 1915년 봄에 넘어지면서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이 곳에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고, 그 위에 꾸보 4호인 고달사지 승탑이 있다.“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또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라고 쓰고서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馬岩과 신륵사의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주읍 영일루 아래에 있는 큰 바위가 마암이다. 그곳에는 목은 이색에 얽힌 일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년째 되던 오월 신록이 물들어 가는 이곳 여강에 한 척의 배가 떠 있었고 그 배에는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더불어 3은인 목은 이색과 그를 따르는 젊은 선비들이 타고 있었다. 당시 이색은 이태조가 사신을 보내 벼슬을 내리는 것을 거절한 채 초야에 살고 있었고 이색의 제자들 역시 새 왕조에 참여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몰라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연후에 목은 이색은 술 한 병을 꺼냈다. 이성계가 보낸 술이었다.

그 술을 한 잔 마신 이색은 그 배 위에서 그만 세상을 하직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색의 제자들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했던 정도전과 조준이 꾸민 계획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색의 의문사는 세월 속에 잠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그 마암 건너편에 신륵사가 있다.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에 원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절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주 회암사에서 설법하던 나옹선사는 왕명에 의하여 병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밀양의 형원사로 내려가던 중 이곳에서 입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이색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날 진시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씻고 있는데 구름도 없는 날씨에 사방 수백 보 안에 비가 내렸다. 이에 사리 155과를 얻었다. 신령스런 광채가 8일 동안이나 나더니 없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퇴락해 가던 신륵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불사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