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중바우와 동고산성, 그리고 정여립의 자취를 찾는 답사가 진행됩니다.

산중산담 2019. 6. 26. 10:45


중바우와 동고산성, 그리고 정여립의 자취를 찾는 답사가 진행됩니다.


 

201862,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세 시간 동안 대동사상기년사업회산하 <남고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중바우와 견훤의 왕궁터라고 알려진 동고산성, 그리고 정여립의 친척묘를 찾아갑니다.

물왕말에는 백제 왕궁의 석축만 남아

육당 최남선이 1925년에 발표한 국토순례기심춘순례에도 반태산 밑 철로 밑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943년에 간행된 전주부사 全州府史에 의하면 전주역 동편 반태산[현 중노송동 2가 사무소앞 무랑말]의 구릉지는 후백제 견훤왕의 궁터로 보아도 큰 잘못이 없으며, 또 승암산 동남방 성황사에 소재한 산곡의 성터가 같은 왕궁에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거나 조선 총독부 도서관의 조사관 오기야마 히데오(적산수웅荻山秀雄)가 조사한 바대로 반태산 일대 민가를 조사한 결과 후백제 왕궁의 건축 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각이 진 석재와 대형 댓돌이 1만여 개가 현존하고 있다라는 기록도 있으며, 몇 년 전에 KBS와 답사 도중 민가에서 당시의 주춧돌 세 개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나마 1980년에 발굴을 마친 동고산성에선 전주성이라는 글씨가 찍힌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되었고, 남고산성에는 후백제 견훤이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김제 금산사 들목에 있는 견훤이 축조했다는 홍예문이라는 견훤성문이나 그가 3개월여 유폐되었던 금산사에도 견훤에 대한 문구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켄자스 대학의 허스트 3세 교수는선인, 악인, 추인이라는 논문 중 고려 왕조 창건기 인물들의 특성이라는 글에서 견훤 역시 악인이라는 이미지로부터 상당히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는 쇠퇴하는 힘에 대항하여 맹렬히 공격한 한반도 남서부 지역 인물{?}로서, 아직도 천명을 보유하고 있던 신라 왕조와 함께 상당한 군사적?도덕적 힘을 지니고 있던 백제인이었다. 견훤의 왕국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존재하였으며 더구나 번성했었다. 다만 지지한 사람들과 지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도 역시 상당한 지도력과 군사적 자질을 소유하였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고 논문을 마무리 한 뒤 운명의 뒤틀림이 없었더라면 10세기 한국은 견훤에 의해 통일되었을지도 모른다. 옛 백제의 중심 지역으로부터 한반도를 통일하는 새 왕조 창건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백제 계승자로서의 역사를 선전했을 왕조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다라고 말하며 견훤 백제의 패망을 아쉬워했다.

 

그를 법률에 의해 처리했다.

이발의 광산 이씨 가문과 조대중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에 있던 그들의 인맥도 끊어지고 말았다. 전주와 김제 일대의 사람들이나 동래 정씨 사람들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동래 정씨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 고을 저 고을로 뿔뿔이 흩어져 갔고 더러는 성씨마저 바꿔야 했다.

몇 년 전 KBS에서 역사스페셜을 제작하고 있을 때, 동래 정씨 문중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전주 기린봉에 정여립과 11촌 되는 사람의 무덤이 있는데, 후손들은 충청도 증평으로 쫓겨 갔고 1979년에야 무덤을 복원했다는 것이었다. 제작진과 함께 무덤을 찾아가니 봉분을 새로 만들어 무덤을 판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묘 앞을 지키는 문인석 중 하나는 얼굴이 시멘트로 다시 만들어져 붙어 있었다. 목이 잘린 채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캐내어 복원했다는 것이다. 다른 문인석은 귀가 잘려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더욱 참혹했던 것은 익산 출신의 뛰어난 문장가인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비문이 조각난 채 묻혀 있다가 상석으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축옥사 이후 호남과 영남 일대, 특히 지리산 쪽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 가면 기축옥사의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후손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