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글 모음16

모든 것이 다, 오면 가는 데,

산중산담 2019. 6. 26. 10:58


모든 것이 다, 오면 가는 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 밤에

불경을 읽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맑고, 향기로운 글들만 가득하다.

세상이 이렇게 맑고 순수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항상 요지경속이고, 아수라장이라,

세상 속에서 사는 것이 하루도 편치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생에 태어난 이상,

이 생에서 부대끼고 사는 것이 운명이거늘,

그래도 살아가는 날까지는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부처님은 지혜롭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지혜는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이다.“

<자치품自治品.에 실린 글이다.

 

배울 것을 배운 지혜 있는 사람은,

생각이 민첩하여 하나를 들으면 만을 알며,

그때그때의 행동에 잘못을 저지름이 없이

다 판단해서 막힘이 없다.

마치 혀가 음식을 맛보아, 달고, 시고, 짜고,

심심함을 다 알아내는 것과 같다.“

역시 <자치품>에 실린 글이다.

이렇게 지혜롭게 살면 되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고,

그래서 가끔씩 어리석게 살 때가 많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약간 어리석게 사는 것이나 지혜롭게 사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 피장파장이 아닐까?

 

물은 흘러 언제까지

(滿지 않고,

 

타오르다가 멀지 않아

꺼지는 불꽃,

 

보게나, 해는 뜨되,

금시에 지며,

 

보름달은 어느 덧

이지러짐을,

 

세도가 하늘 뻗는

사람에게도

 

무상의 바람은

한결 같아라.“

<업연품業緣品>에 실린 글이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사는 것은 매 한 가지다.

그래도 하지만, 하지만 하면서 살아가는 삶,]

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흐르다가 보면 어느 날 문득

어디선가 멈출 곳 있지 않을까?

 

개암사, 선운사, 내소사

삼사를 거닐며. 무거운 마음을

비워야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평안한 날 되소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것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것들,

 

나이 들어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설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이가 들어 자기 분수를 알고서 조심하는 사람도 있다.

조심하고 조심해도 어려운 것이 세상의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원한을 품고서 세상과 맞서다가

더 어려운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 많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 중에 송익필, 송한필이라는 형제가 있다.

조선의 선비 1천 여 명이 죽은 기축옥사의 얼굴 없는 주인공

송익필은 문학으로서는 김시습, 남효온과 함께 평가되었고,

이이가 칭송을 마지않았으며, 사계 김장생이 스승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 <족하거나 부족하거나 족하다.‘足不足是足>를 보자.

 

내 나이 칠십에 궁한 골짜기에 누웠노라니,

사람들이야 부족하다고 하지만 나는야 족하다.

아침에 일만 봉우리를 바라보니 백운이 일어나

스스로 가고 스스로 오며 높이 오르는 것이 족하다.

저녁에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명월을 토해서

넓게도 넓게 금물결 일어나니 눈앞 광경이 족하다.

봄에는 매화가 가을에는 국화가 있어서

번갈이 이울어지는 것이 무궁하니 그윽한 흥이 족하다.

상 하나에 경서經書를 두니 도학의 맛이 깊고,

언제나 선현의 인물을 사귀니 스승과 벗이 족하다.

벗이야 선현에 비한다면 비록 부족하다 하겠으나,

백발이 머리에 가득하니 나이도 족하다.“

 

송익필은 기축옥사 당시 제갈공명과 같은 책사 역할을 담담했고,

송강 정철은 돌격대장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선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도 그가 남긴 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고 있으니,


지난 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졌네.

애달프다! 봄날의 사연이

비바람 속에 왔다 갔구나.“


이 시는 송익필의 동생인 송한필의 <우음偶吟>이라는 시다.

뉘라서 삶을 안다고 하겠는가.

단지 견디고 견디다가 어느 날 문득 가는 것이

삶인 것을,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체감한다.


나무는 가을 되어 뿌리만 남은 뒤라야

꽃 피던 가지, 잎 무성하던 잎 새가 다 헛된 영화였음을 알 것이요,

사람은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 이르러서야

자손과 재물이 쓸데없음을 알지니라.“

채근담의 글 한 편이 어찌 그리도 절묘한지,

한 밤의 적막이 무겁고도 깊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로를 지나가는 나그네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로를 지나가는 나그네다.

 

내 삶이 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내 정신을 관통했던 글이 있었다.

세상은 재앙으로 가득 찬 길이고,

우리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이며, 죽음은 상처의 끝이다.”

제프리 초서의 이 글을 읽으며 인생이란 더도 덜도 아닌

고통의 연속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오랜 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했지만,

가끔씩 세상이라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흐릿한 햇살, 재앙이 아닌 행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바늘구멍 같은 희망이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살아온 것이리라.

 

요즘 들어 부쩍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삶과 죽음의 문제,

세상에 태어난 그 모든 것이 다 왔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나도 또한 별 수 없이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면서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간, 인간은 어찌하여 태어나고, 또 가는 것일까?

인간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 또한 왜 나고 죽는 것일까?

 

인간은 얼마나 죄가 많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인생은 악이다. 왜냐하면 만일 세계가 의지라면 세계는 고통의 세계이다.

첫째 의지 자체가 욕망이며,

의지는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악이다. 왜냐하면 고통이 인생의 기초적 자극이고, 실체이며,

쾌락이란 단지 소극적인 고통의 정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악이다. 고통과 궁핍이 그치지 마자 홀연 권태가 찾아와서,

권태 또한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인생은 악이다. 유기체는 고등하게 되면 될수록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인식의 발달은 아무런 해결을 주지 못한다.

천부의 재질을 타고난 자는 가장 많이 고뇌한다.

죽음 그 자체보다도 죽음을 생각하는 그 자체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생은 싸움이기 때문에 재앙이다.

의지, 격렬하고 집요한 생명력, 자발적 마성,

부단한 욕망의 의지가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처에서 투쟁, 경쟁, 충돌 및,

승리와 패배의 자멸적 교체를 보게 된다. 살려는 의지는 결국,

굶주린 의지이므로 자기 자신을 뜯어먹고 살 수밖에 없다.

인생은 지출이 보상되지 않는 장사이며,

인간의 생애란 희망에 속고 죽음에 뛰어드는 것일 뿐이다.“

우수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실린 글이다.

 

인생이란 지출이 보장되지 않는 장사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을 것도, 밑질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여겼지만,

살아갈수록 삶은 어렵고, 그래서 결국 인생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도 못한 채

떠나는 것이라고 혼자서 되뇌는 것,

철학 자체가 죽음 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과 친숙해지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긍정이고 삶의 자세가 아닐까?

 

지금까지 내내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산을 오르는 것으로 보였겠지,

그러나 내 삶은 사실은 항상 발 아래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벌써 죽음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일부분이 가슴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새벽이다.




한 발 한 발 걷지 않고서는 천리千里를 갈 수 없다.


한 발 한 발 걷지 않고서는 천리千里를 갈 수 없다.

 

한 발 한 발 걷지 않고서는 천리千里를 갈 수 없다.”

<순자>의 말이다.

이 말을 교훈 삼아 많이도 걸었다.

많이 걸었으면 알아야 하는데, 아는 것은 얼마 되지도 못하고,

모르는 것만 많아, 매일 여기, 저기서 망설이고, 서성이다가

혼자서 머쓱해하고, 혼자서 쓸쓸해 한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없고,

내년, 내년 하면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시간, 시간 하면서 어느 새 하루요.

하루하루 지나기 어느덧 한 달이요,

한 달, 두 달 지나가 문득 일 년이 지나가고

일 년 이년 뒤바뀌어 죽음에 당도하니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삶은 닦을 수가 없네.“

원효스님의 글이다.

 

이러다가 어느 날 문득, 별로 해놓은 것도 없이,

그렇다고 제대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 앞에 당도하지는 않을지,

살아갈수록 삶은 어렵고, 지난하다.

심부재언心不在?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 이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분노나, 유혹, 고뇌를 끊지 못하면 마음이 바로 서지 못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것은 아닐까?

가끔씩 불끈 불끈 치미는 슬픔, 미움, 이런 것들이

누군들 없겠느냐마는 나도 그렇다.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하면서,

사람만이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되뇌면서도,

내가 사람을 치는 줄은 모르고

내가 다른 사람에 치인다고 생각하면서

고뇌를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사람 그려 사람 하나 죽게 되니

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아 사람 살려라, 사람 우선 살고 보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사람의 시다.

 

우선 내 마음부터 제대로 갈무리하자.

흐르고 흐르는 강물처럼 부단히 흐르게 하자.,

마음의 강을,

꿈이고 희망은 그 다음 문제다.

그래야 천리, 이 천리를 가지 않겠는가?

나여!, 내 마음이여!




가끔씩 문득 예고도 없이 오는 행운,

가끔씩 문득 예고도 없이 오는 행운,

 

옛날 풀숲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무엇인가를 찾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찾는데,

하나도 찾지 못했던 것,

바로 네 잎 클로버였다.

금세 찾는 사람들은, 또 금세 하나, , , . 잘도 찾는데,

아무 리 용을 써도 찾을 수 없던, 네 잎 클로버,

그래서 그랬을까, 내 인생에

노력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행운은 없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내가 견디어 낸 고통의 무게만큼,

내가 참아낸 슬픔만큼만

행운 같은, 아니 불행 중 다행인 것 같은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고 할까?

그런데 그 세월들을 지내 놓고 나니,

그 슬픔의 세월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다행이었는지를 여실히 깨닫는다.

 

지나고 나서야 안다.

마음을 비우고서야 안다.

가진 것이 없으므로 인해서 삶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가지므로 인해서 삶이 얼마나 무거워지는지를,

새의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나는 해가 금과 같이 반짝이고,

벚꽃이 눈처럼 활짝 피는 곳을 알지요.

바로 그 밑에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네 잎 클로버가 자라는 곳이 있지요.

 

잎 하나는 희망을, 잎 하나는 믿음을,

그리고 또 잎 하나는 사랑을 뜻하잖아요.

하지만 하느님은 행운의 잎을 또 하나 만드셨어요,

열심히 찾으면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 수 있지요.

 

하지만 희망을 갖고 믿음을 가져야 하지요.

사랑해야 하고 강해져야지요.,

열심히 일하고 기다리면 네 잎 클로버

자라는 곳을 찾게 될 거예요.“

엘라 하긴슨의 <네 잎 클로버>라는 시 구절과 같이

온 몸으로, 온 정신을 다해

살면서 기다리다가 보니,

가끔씩 오는 행운 같은 행복,

그것이 바로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봄바람 같이 불현 듯 오고 간다는 것을,

이 한 밤에 자다가 일어나 깨닫는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가끔씩 문득 예고도 없이 온다는 것을,

풀과 풀 사이에서

느닷없이 보이는 네 잎 클로버나,

아무렇게나 길가에 피어 있는 돈나물이라고도 부르는

돌나물 꽃과 같이,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보낸 하루,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보낸 하루,

 

어쩌다가 보니 하루 종일

시간차를 두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살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 오래 전에 본 사람,

예전 같으면 말문을 여는데 한 참의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금세 마을을 열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음 내려놓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와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가끔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가끔씩은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 사이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삶을 풍요롭게도 하고, 삶을 지겹게도 하는데,

그렇다면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들, 여러 해 전에 보았지. 하지만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들은 늘 바람을 따라 다니지. 그들에겐 뿌리가 없거든,

그래서 상당히 불편해 하지. 그것이 바로 사람이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의 한 소절이다.

 

그 말이 맞다. 뿌리가 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

오늘날엔 바람도 아니고 돈을 따라 다니거나

권력이거나 명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몇 가지 법칙을 정한 사람이 있다.

 

가장 심오한 것을 생각 하는 사람,

가장 생동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계를 바라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

드높은 젊음을 이해하며

현명한 자 끝에 이르러

아름다움에 마음 기울이는 법.“

독일의 시인 휠덜린은 현명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사려 깊은 사람을 좋아했는데,

살아갈수록 그러한 사람을 만나서 사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 그래서 제이콥스라는 사람은

<시골을 선택했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잘 못 만나 마음에 동요는 없었는지,

평정을 잃지는 않았는지, 늘 되짚어 보아야 한다.”

 

살아도, 살아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내가 내 마음도 모르면서 사는 것이 삶이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지 쓰지 말고 소신껏 살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지 쓰지 말고 소신껏 살자.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천태만상千態萬象이라고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우주宇宙라서,

저마다의 사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명예, 재물, 권력, 대부분의 사람들이 탐닉하면서

갈구하는 것들이다.

오늘날 그 셋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것은 돈, 재물일 것이다.

그러나 명예나 곧 영광도 그에 못지않다.

순수한 명예나. 영광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누리려는 그 영광이

가끔씩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런 삿된 영광을 매진하는 사람들에게 몽테뉴가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영광을 탐하지 말자.

모든 유익하고 순진한 행동을 가지고 뽐내는 일은,

이런 일을 심상치 않고 희귀하게 보는 자들이 할 일이다.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힘이든 가치로 올려놓는 것이다.

선한 행동의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나는 그 선한 점이 선하기보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을 억누른다. 드러내 놓은 것의 반은 이미 할인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것을 성취한 자들의 손에서 자연스레 풍겨져 나오거나, 점잖은 사람들이 다음에 그것을 택하여 세상에 묻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그 자체가 좋으므로 세상에 알리려고 드러날 때에.

한층 더 운치가 나는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 3권에 실린 글이다.

 

이래야 하는데,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인들이나 예술가들까지

덧없는 명성과 영광에 목을 매달고 있다.

 

일찍이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말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성취된 행적이 휠 씬 더 찬양할만하다고 본다.”

 

자연스럽게 스스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금이?捉? 이익이 되고,

스스로에게도 만족하는 일을 하다가 보면,

어느 날 문득 세상에 이익이 되는 일을 했다.’

평을 받게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흔적을 남긴다.

모든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말이다.

 

살다가 보면 살아온 만큼의 모습을 갖는 것,

그것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참된 인간이고, 삶이다.




어떻게, 어떤 마을을 지닌 채 이 세상을 걸어갈 것인가?

어떻게, 어떤 마을을 지닌 채 이 세상을 걸어갈 것인가?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걷는다.

아장아장 걷다가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또 걷다가

걸음을 멈추는 순간, 그때부터의 삶은 삶이 아니다.

인간은 걸을 수 있을 때 까지만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성스러운 일이 무엇일까?

걷기다. 눈앞에 펼쳐진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도

더 없는 행운이다.

어떤 사람은 성큼성큼 걷고, 어떤 사람은 흐느적흐느적 걷고,

또 어떤 사람은 춤을 추듯 걷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마지못한 자세로 걸어가고,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 나선 병사처럼 걷는다.

나는 어떤가, 나의 걸음을 두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한 듯 걷는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춤을 추듯 걷는다고 말하는데,

저마다의 걷는 방식이 있기 때문에

어떤 걸음이 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 연유로

조심조심 겨울 냇물을 건너듯 인생의 길을 걸어가리라는 생각에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은 사람은

조선후기의 대학자인 정약용이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노래를 부른 사람이

존 레논의 아내인 요노 요코였고,

그는 다음과 같이 걸으라고 충고했다.

선두에 선 사람의 걸음걸이로 걸어라.

1, 땅을,

2, 진흙탕을,

3, 눈 속을,

4, 얼음 위를,

5, 물속을,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

 

존 레논의 아내인 요노 요코의 노래

<살얼음판 걷기>가 나오기 전 20년 전,

1964년에 선 보인 <워킹 피스(Waiking Piece>의 지침이다.

두 사람은 그 뒤 살얼음판을 걷듯이 세상을 살았다.

1980128일 월요일 <살얼음판 걷기>리믹스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존 레논을 마크 채프먼이

존 레논씨?” 하고 묻고서 다섯 발의 총을 쏘았다.

등에 두 발, 목과 어깨에 한 발씩,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빗나갔다.

병원으로 이송된 존 레논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산다는 것은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살고 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미래, 가고 없는 과거,

존재하는 것은 바로 지금지금밖에 없다고 우기고 다짐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이렇게 진행되어도 괜찮은 것이 삶인가?













'''